1866년 봄에 시작된 병인박해로 당시 12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중 9명이 체포되고, 3명이 중국으로 피신했다. 숨어 있던 선교사들이 매우 빨리 체포되고 속전속결로 재판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조선 정부가 이미 천주교의 조직과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집주인 홍봉주의 집을 수색하면서 시작된 박해는 2월 23일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데 이어, 3월 초까지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와 정의배·전장운·최형 등이 체포되며 가속화했다. 그리고 고발된 남종삼마저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왔다.
추국이 열렸고, 3월 7일 체포된 지 거의 12일 만에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 등 4명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날 평신도 지도자였던 남종삼과 홍봉주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였다. 목판인쇄소를 운영하다가 체포된 최형과 전장운도 서소문 형장에서 3월 9일경 처형당하고, 3월 11일에는 정의배·우세영과 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가 다시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내포 지역에서는 3월 11일에 거더리의 손 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이어서 위앵·오메트르 신부와 황석두(루카)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던 중 제천에서 체포된 장주기(요셉)도 추가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당시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대역죄인에 적용되는 부대기시(不待其時), 곧 사형판결 즉시 형장으로 끌려가 사형이 집행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혼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국혼(國婚)에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서울에서 250리(약 100㎞)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도록 정해졌다. 그리하여 다블뤼 주교를 포함해 5명의 사형수는 갈매못으로 끌려가 3월 30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서울에서 충청 갈매못 형장까지 마지막 길
이 다섯 성인은 모두 서울로 압송당하여 신문을 받고, 다시 서울에서부터 충청 갈매못 형장까지 마지막 길을 가야 했다. 3월 24일 형이 선고된 다음 날 형장으로 호송되기 시작했다. 고문을 받아 상처가 난 다리는 기름종이로 싸매고 몇 조각의 헝겊으로 잡아맨 채, 노란 모자를 쓰고 오랏줄을 목에 걸고 말을 타고 출발하였다.
최근 이들 다섯 성인이 호송된 길을 중심으로 ‘갈매못 다섯 성인 순교길’을 재구성하여 순례하기도 한다. 이 길 가운데는 음봉 삼거리의 한 바위에서 식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가를 부르고 다블뤼 주교의 마지막 강론을 들으며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를 ‘복자 바위’라 불렀고, 1973년 절두산 성지로 옮겨져 ‘오성 바위’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본래의 자리에는 같은 크기의 바위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은 꼬박 6일 정도 걸려서 3월 29일 수영(水營)에 도착했으나, 포졸들은 다음날 사형수들을 이웃 마을로 데려가 구경시킬 계획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3월 30일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므로 그날 처형되기를 위엄있게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그해 성금요일 모래사장이 있는 형장으로 이송되었다. 200여 명의 군사가 좌우에 줄을 지어 늘어섰고, 다섯 순교자는 군사들 끝의 강가에 섰다. 교구 재판록에는 당시의 모습을 증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법장에 이르러 수사는 높은 데 장막을 치고 앉고, 군사들은 좌우로 가운데를 비워주고 서 있고, 죽일 사람들은 군사들이 서 있는 끝 강가에 내려놓고 결박하였던 것을 끌러 놓고 상투에 명패 하나씩 달았는데?.”
수사(水使)는 다담상(茶啖床)을 내오도록 하여 이들이 마지막 음식을 들도록 하고 형을 집행했다. 다블뤼 주교로부터 참수형이 집행되었는데, 칼이 잘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간을 끌며 보수를 더 요구하는 망나니가 있어서 그 고통이 더했다고 전해진다.
사흘 동안 효시된 시신 형장 모래에 파묻어
사흘 동안 효시가 되었다가 갈매못 마을에 사는 외교인들이 어느 날 시신을 그대로 형장의 모래에 파묻었다고 한다. 갈매못 모래밭에 세 명의 선교사 시신을 한 구덩이에 묻고, 황석두·장주기 회장 두 명의 시신을 또 한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이 중 황석두 회장의 시신은 제일 먼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홍산 삽티에 안장되었다. 나머지 4위의 유해는 4월 8일 수습해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4개의 구덩이를 파고 관도 없이 시신을 안장하고, 그 위에 하나의 봉분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음력 7월경 배를 이용하여 서짓골(서재골) 매장지로 이장하였다. 당시 이장에 참여했던 이치문(힐라리오)의 증언이다.
“죄인의 식구와 질서(姪壻, 조카사위)인 이성여 바르나바와 함께 시체 묻은 곳을 4월 초 8일에 가 본즉, 잔돌로 봉분을 쌓아놓았기에 주막이 가까이 있는 고로 소리 나지 않게 손으로 차차 헐어 들어갔습니다. 시체 하나가 드러나기에 보니, 적신(赤身)으로 묻고 또 목은 다 각각 제 몸에 맞추어 놓고 칡으로 허리를 둘러 묶고 칡 틈에 나무로 패를 만들어 언문으로 쓰기를 오가(吳哥)라 하였기로 오 신부이신 줄을 알고, 또 다음에 안 주교 시체가 또 그 모양이고, 그다음은 민 신부이고, 그다음은 장 회장이라?.”
이후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82년 11월 6일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성당 내 조선대목구 대표부로 보내졌다가 1894년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치되었다. 다시 6년 뒤인 1900년 9월 5일에는 명동대성당 지하묘역에 옮겨진 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식(1968년 10월 6일)을 1년 앞두고 1967년경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병인박해까지 조선에 들어온 20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중 12명이 순교하였는데 3명은 1839년 박해 때 새남터에서, 그리고 1866년 박해에 새남터에서 6명, 보령 갈매못 사형터에서 3명이 군문효수형을 당했던 것이다. 특별히 갈매못의 다섯 성인을 기리는 이유는 이들이 보여준 신덕(信德)과 용덕(勇德)뿐 아니라, 그들의 성해를 보존하기 위한 신자들의 뛰어난 노력과 성실함을 함께 기억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