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 많은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가르치는 천주교에 입교한다. 그중에서도 성 현경련(베네딕타·1794~1839)과 복자 강완숙(골룸바·1761~1801)은 여성 회장으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인물들이다. 사제를 모시며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의 신앙의 삶을 살펴본다.
가족과 신앙을 나누다
성 현경련과 복자 강완숙은 홀로 외로이 신앙생활을 해나가지 않았다. 그들의 가정은 평화로 가득했다.
역관 집안 출신인 성 현경련은 1801년 신유박해에 순교한 복자 현계흠(플로로·1763~1801)의 딸이며 그녀의 동생은 성 현석문(가롤로·1797~1846)이다. 시댁 역시 유명한 신자 집안으로, 시아버지 복자 최창현(요한·1759~1801)은 한국교회 설립의 주역으로서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성인은 혼인 3년 후 남편을 잃고 자녀가 없어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집안이 화목해 사람들은 모두 이 집안의 생활을 감탄했다.
양반의 서녀로 태어난 복자 강완숙은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지 얼마 안 돼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됐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복자 홍필주(필립보·1774~1801)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충청도에 만연한 천주교를 조사하며 복자의 집안을 세심히 살핀 관찰사는 “노비와 주인, 존비, 친소의 구분이 없다. 길 가는 사람이 제 입으로 그 학문을 하는 자라고 하면 중요한 손님처럼 공경하고 가까운 친척처럼 아낀다. 거처와 음식도 달건 쓰건 함께하는데, 떠날 때는 반드시 노자를 준다”고 밝혔다.
사제가 믿고 맡긴 여 회장
성 현경련은 성 앵베르 주교(1796~1839)가, 복자 강완숙은 복자 주문모 신부(야고보·1752-1801)가 여 회장으로 임명했다. 그들의 신심과 덕행을 보고 들어 큰 자리를 맡긴 것이다.
평소 성 앵베르 주교는 성 현경련을 두고 “여 회장은 베네딕타가 감당할 만하다”라고 치하했다. 그녀는 자기 개인의 성화를 위해 힘쓰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른 이의 성화를 위해서도 힘썼다. 또 냉담 교우들을 권면하며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병자들을 간호하며 죽을 위험을 당한 비신자 어린이들에게 대세 줄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또한 선교사들의 순회 시기가 되면 신자들을 본인 집에 모이도록 해서 할 수 있는 대로 성사를 받을 준비를 시키곤 했다.
성 앵베르 주교는 체포될 때 그가 기록하던 「앵베르 일기」 즉, 「기해일기」의 원본인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그녀에게 맡겼다. 성인은 그 일기를 계속해서 기록하다가 그녀 역시 체포될 때 동생 성 현석문에게 맡겼다.
복자 강완숙은 한양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어머니와 아들과 의논해 함께 상경했다.
1794년 말 복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녀는 세례를 받고 주문모 신부를 도와 활동했다. 이때 주 신부는 복자 강완숙의 인품을 알아보고 여 회장으로 임명해 신자들을 돌보도록 했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복자 강완숙은 자신의 집을 복자 주문모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이후 그녀는 주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했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됐다.
당시 그녀의 헌신에 대해 황사영(알렉시오·1775~1801)은 「백서」에서 “박해 후에 신부가 그 집을 거처로 정하였다. 6년 동안 교회의 중요한 사무에 모두 그녀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신부가 총애하여 신임함이 몹시 융숭하여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체포돼 더 심한 고초를 겪다
여 회장이 된 성 현경련과 복자 강완숙의 신앙생활과 활동은 곧 박해자의 눈에 띄게 됐고, 박해가 일어나자 제일 먼저 고발된 사람들 중에 들게 됐다. 그들은 다른 신자들보다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포장은 성 현경련의 동생 성 현석문이 성 샤스탕 신부(1803~1839)의 충복이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신부가 숨은 곳을 그녀를 통해 알아내려고 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페레올 주교(1808~1853)의 기록에 따르면 포졸들은 20번 넘게 그녀를 몹시 괴롭혔으며 법정에서 11회 문초를 받고 주리를 틀렸을 뿐 아니라 몽둥이로 300대 이상 맞았다.
형조로 옮겨진 성 현경련의 몸은 갈기갈기 찢기고 상처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내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옥중에 만연된 열병에 결려 그녀의 고통은 한층 더 심했지만 성인은 조금도 뜻을 굽힐 줄 몰랐다. 마침내 사형이 선고되자 성 현경련은 기쁜 마음으로 순교의 칼을 받았다.
복자 강완숙은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면서도 복자 주문모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그녀에게서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복자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결국 복자 강완숙은 굳은 신앙을 증거하며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