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술가
저는 어릴 적부터 당연히 예술가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서울 홍제동에서 살았는데요, 어린 시절에는 집 앞 홍제천에서 진흙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진흙으로 여러 모양을 만드는 것이 익숙했죠.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진흙을 지금도 만지고 있네요.
그러던 중 고등학생 때 갈등이 있었어요. 머리가 크고 보니까 예술가를 했다가는 굶어 죽게 생겼거든요. 한번은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니 ‘너는 공부도 잘 하는 놈이 왜 미술을 하려고 하느냐?’면서 다 말렸어요. 그래도 예술이 하고 싶어 그 친구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알아. 하지만 그래도 굶어 죽을 때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고 했죠.
게다가 가난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께서 돈벌이에 통 관심이 없으셨으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서예로 글씨를 써서 여기저기 그냥 나눠주는 아버지의 작품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본래 옛날부터 재주 있는 놈이 재주 없는 놈의 종 노릇을 해 줘야 되는 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의 말씀이 제게 딱 꽂혔어요. 제가 받은 탈렌트로 사회에 봉사하고 거기서 기쁨을 얻으며 살자고 다짐했어요.
세상을 밝히는 하느님의 도구
그렇게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어요. 조각 일을 하고 굶어 죽을 각오는 돼 있었어요. 하지만 누가 굶어 죽고 싶겠어요. 그게 늘 한편에 부담감으로 있었죠. 그러던 중 우연히 옆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는데, 성경 속 등불의 비유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더라고요. ‘하느님이 그러셨다는데 왜 등불을 켜서 함지박 속에 두느냐? 등불을 멀리까지 비출 수 있는 등경 위에 놓지’ 이런 이야기였어요. 당시만 해도 종교가 없던 때였는데요, 이 이야기가 제게 섬광처럼 와 닿았어요. ‘내가 등불이 돼야겠구나. 다른 데까지 비추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보충해 주고 비바람을 막아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작가가 되어 좋은 작품을 만들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거죠.
학부 시절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같은 화실에 있던 한 선배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고 나서 그의 삶이 변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분을 통해서 세상을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대학 졸업 후 앞으로의 삶이 막막했을 때 누군지 모르는 큰 존재에게 의지하고픈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무작정 명동성당에 찾아가 예비자 교리를 받고 6개월 뒤 세례를 받았어요. 기대고 싶은 ‘빽’을 바랐던 거죠.
저희 교리반을 이끌었던 신부님께서 세례를 받으면서 하는 기도는 꼭 이뤄진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세례를 받으면서 ‘조각가로서 세례 받은 이후 첫 작품은 예수님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 봉헌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냥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 제가 보답을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그런데 얼마 후 성당 청년회에서 광주 무등산에 있는 한센인 마을로 봉사하러 가는데, 예수성심상을 봉헌하기로 했다는 거예요. 성물을 만든 적은 없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느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었다는 것이 저에게는 엄청난 기적과도 같았어요.
이후 서울 공항동성당을 지을 때 십자고상과 십자가의 길, 프란치스코 성인 조각상 등 성물을 작업했어요. 그리고 수원교구 분당성요한성당 십자고상을 제작했죠. 분당성요한성당 십자고상 만들 때의 일인데요. 사실 저는 피하고 싶었어요. ‘제가 감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성당을 지으시는 신부님이 부르셔서 가는데, ‘못하겠다’고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공사 중인 성당에 ‘쿵’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저는 이 소리가 ‘왜 하지 않느냐?’라는 호통으로 들렸어요. 그러면서 만약에 십자고상을 만들면 좀 돌아가신 예수님 보다는 하얀 색으로 죽음에서 승리하신 부활하신 그런 십자고상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를 부르신 신부님이 프랑스에서 가져온 작은 십자고상을 내어놓는데, 제가 상상했던 바로 그런 십자고상이었어요. 그러면서 신부님이 ‘우리도 이런 식의 십자고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라고 말씀하셨어요. 안 할 수가 없었죠.
처음에는 승리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만들다가, 점점 승천하면서 우리를 걱정하시는 예수님, 우리를 보고 흐뭇해 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됐어요. 제가 만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제 손을 빌려 만드셨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에요.
탈렌트를 나누는 예술가
1998년 IMF 금융위기로 남들은 일자리를 잃을 때 독일 유학 후 귀국했는데요. 운이 좋게도 모교에서 교편을 잡게 됐어요. 그때 제가 ‘등불이 됐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교수가 되니 비바람 맞지 말라고 연구실도 주고요. 기름이 떨어질 때쯤 되면 월급이라고 또 돈을 주고요. 주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다 주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작가로 성장하도록 노력했던 것 같아요.
작업을 할 때는 제가 좋은 것에 굉장히 집착을 하는 편이에요. 좋은 것 이상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제가 작가로서 좋은 것, 호기심 이런 것들을 포착해 작품으로 전달하고 싶어요. 이런 작품들을 통해 제가 기쁘고 보는 이들을 즐겁고 기쁘게 한다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제가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사는 일, 이 일을 끝없이 하려고 합니다.
◆ 이용덕(루카) 작가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 졸업 후 독일 베를린 예술종합대학에서 마이스터쉴러 과정을 졸업했다. 1988년 첫 전시 시작으로 중국과 독일, 미국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1987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2011년 김세중 조각상, 2016년 문신미술상 본상을 수상했다. 역상조각을 예술로 승화시켰으며, 서울 남산 안중근기념관의 안중근 의사상을 비롯해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김수환 추기경상과 프란치스코 교황상 등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