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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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조선 교우들 만나려는 계획 포기하고 산서로 발길 돌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20. 목숨 걸고 화북평원을 종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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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는 동지사 일행으로 오는 조선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 북경까지 해로를 이용하려 했으나, 남경교구 소속 중국인 신부와 길 안내인들의 반대로 육로로 가야만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3년 7월 하순에 건넜던 양자강 전경. 출처=Britannica

소주에서 조선 향해 된더위 속 육로로 이동

우리는 1833년 7월 20일 소주에서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일단 북경으로 가서 동지사 일행으로 오는 조선 교우들을 만나고, 또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에게 조선 입국을 위한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왕 요셉 외에 라틴말을 할 줄 아는 40세가량인 양 요한과 노인인 도 바오로를 길 안내인으로 고용했습니다. 저는 바닷길을 이용해 배로 북경까지 가길 희망했으나, 현지 중국인 신부가 “선장과 선원들이 도무지 미덥지 않다”며 “육로를 이용하라”고 강권했습니다. 왕 요셉 역시 “배에 문제가 생겨 주교님께서 익사라도 하는 날엔 조선 교회는 끝장납니다”라며 바다로 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강과 수로를 이용해 내륙으로 들어가서 북경까지 육로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작은 배로 황제 운하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풍랑이 심해져 7월 31일 하선해야만 했습니다. 이후 약 보름 동안 절강성에서 산서성 접경까지 펼쳐진 평야 지대를 걸어서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화북평원입니다. 안휘성과 하남성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장장 1180㎞에 달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중국의 7~8월은 불볕 더위와 장마가 기승을 부리는 때입니다. 특히 강남의 7~8월 된더위는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이 시기에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뿐입니다. 때로는 질식해서 죽을 위험을 무릅씁니다. 열대 지방이 이보다 더 더울까 싶습니다. 전혀 햇볕이 들지 않는 방에 있는 탁자와 나무 의자가 불에 쬔 것만큼이나 뜨겁습니다.

도 바오로가 당나귀 두 마리와 손수레 두 대를 구해 왔습니다. 수레 한 대에는 저와 안내인 한 명이 타고, 나머지 수레에는 짐을 실었습니다. 남은 두 사람은 수레를 끄는 당나귀에 올라앉아 마부 노릇을 했습니다. 길 안내인들은 생김새가 자신들과 다른 저를 들키지 않게 하려고 가난한 중국인으로 꾸몄습니다. 더러운 바지와 내의를 입히고 낡은 밀짚모자를 씌웠습니다. 그리고 검정 천으로 제 눈을 가렸습니다. 이 해괴한 행색 때문에 오히려 여행 내내 중국인들의 더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제 주위로 몰려왔고, 아이들은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저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우리는 발자국마다 만나는 비, 나쁜 길, 조수의 간만, 진창 탓에 걸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수레를 끌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걸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불편한 중국 신발과 긴 양말 대용의 장화 때문에 곧바로 발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이 이상야릇한 중국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갔습니다. 일행이 이것을 보자 질색을 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푸하오 칸”, 곧 보기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신발을 신지 않는 중국인을 보기란 드문 일입니다. 거지가 배고파 죽을 수는 있지만, 맨발로 죽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제 늙은 안내인 도 바오로는 자기 신발에 어찌나 집착하는지 냇물도 신발을 들고 건널 정도였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여름 이질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쉬지 않고 조선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 화북평원을 걸어서 종단했다. 화북평원 옥수수밭.

피로와 무더위로 이질에 걸려 기진맥진

걷기 시작한 첫날부터 제 몸 상태가 악화됐습니다. 피로하고 무더운 데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었기에 심한 복통이 왔습니다. 이질 증상이 분명했습니다. 즉각 열이 오르는 바람에 저는 매번 눕거나 앉아야만 하는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휴식이 필요했지만, 쉬었다 가자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일행들 말로는 주막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고, 의원을 부르는 것은 더더욱 큰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교우 집을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세 명의 길 안내자 중 누구도 그곳 교우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현지인들에게 교우 집 정보를 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그나마 영양분이 풍부하고 위생적인 음식을 먹었다면 기운을 다시 차릴 수 있었겠지만, 일행이 제게 준 음식은 찐 만두뿐이었습니다.

만두 속을 채운 마늘과 다른 열대 양념들 때문에 제 뱃속에서는 불이 났고,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이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더더욱 고열로 목이 타서 입술이 말라붙어 손으로 떼어내야만 입이 벌어질 지경이었으나 일행은 중국인 식사 예법에 어긋난다며 마실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밤에 마시려고 그들 몰래 차 한잔을 감추어 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들에게 들키는 날이면 무자비하게 뺏기고 맙니다. 중국에서는 밤에 물을 마시는 관습이 없다면서요. 저는 그들에게 중국식으로 마시고, 먹고, 기침하고, 코 풀고, 걷고, 앉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이질로 기진맥진한 데다 작열하는 햇볕에 거의 질식 상태가 돼 그늘에 가서 앉으려면 일행은 “어떻게 괴로움을 줄이려고만 하십니까? 주교님이 쉬어야 할 곳은 햇볕 아래, 쓰레기더미입니다. 조선에 들어가시면 십중팔구 순교하시게 됩니다. 그러니 도중에서 돌아가시는 한이 있더라도 더위와 허기와 갈증과 발열 따위로 인한 고통을 견뎌내셔야 합니다”라고 나무랐습니다. 이런 논리 전개는 침묵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되도록 빨리 북경으로 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1833년 8월 13일 황하를 건너 산동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황하를 건너기 위해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을 태운 나룻배에 올랐습니다. 배에서 내릴 즈음 저는 갑자기 숨이 막혀 20여 분 동안 발작하는 사람처럼 땅바닥을 뒹굴었습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자 일행이 저를 들쳐 업고 황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바람이 잘 통하는 데서 공기를 마시게 해야 한다며 저를 햇볕이 내리쬐는 밭 한가운데에 눕혀놓았습니다. 그리고 제 얼굴을 가린다고 중국 모자를 얹어 놓았습니다. 이 모자 때문에 바깥 공기가 조금도 통하지 않아 그나마 붙어 있던 미약한 숨마저 아주 끊어질 뻔했습니다. 저는 한 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3일간 널빤지에 눕혀진 채 있어야만 했습니다. 굶주리고 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일행을 따라 다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직예 교우촌에서 한 달간 요양한 후 북경으로 가려 했으나, 페레이라 주교의 반대로 산서로 발걸음을 옮긴다. 직예 교우촌으로 추정되는 헌현대목구 옛 주교좌 성당.

직예에 머물며 페레이라 주교에게 도움 요청

8월 26일 산동과 직예(直隸, 필자 주-브뤼기에르 주교 연구 권위자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조현범 교수는 직예 교우촌이 오늘날 하북성 헌현(獻懸)교구청 자리라고 추정한다. 1856년 헌현대목구가 설립된 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했지만, 대목구 설립 이전에는 유명한 교우촌이었다. 20세기 저명한 신학자요 고생물학자인 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도 한때 이곳에서 활동했다.) 접경에 도착했을 때 두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저를 끌고 갔습니다. 이들은 교우였습니다. 앞서 갔던 왕 요셉이 이들에게 저의 인상착의를 말해 준 것이었습니다. 극도로 쇠약해진 저는 교우촌에서 3주 동안 걷지도 앉지도 못한 채 온종일 침대에 누워 지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한 달을 요양한 뒤에야 기운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다시 길을 나서려 하자 그곳 중국인 신부와 교우들이 우리를 막았습니다. 서양인 주교가 북경이나 만주로 가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큰 위험을 초래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왔던 길로 되돌아가거나 산서·호광·마카오로 갈 것을 종용했습니다. 길 안내인 양 요한조차 이들을 지지했습니다. 오직 왕 요셉만이 저의 편을 들었습니다.

저는 북경에 있는 페레이라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9월 3일 왕 요셉과 교우촌 대표들을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교우촌 대표들은 페레이라 주교에게 저를 도우면 안 된다고 만류했습니다. 이 장면을 왕 요셉이 생생히 목격했습니다. 이후 페레이라 주교는 저를 더는 돕지 않았습니다.

9월 22일 북경에 갔던 사람들이 페레이라 주교가 제게 쓴 편지 한 통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편지에는 “주교님은 산서로 가셔야 합니다. 주교님의 목숨은 지금 하느님과 중국인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조선 선교지를 위해 사용한 모든 비용을 포교성성에서 내주지 않을까 봐 조금 걱정이 됩니다. 나머지는 주교님의 제자가 말씀드릴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은 후 북경으로 가서 조선 신자들을 만나겠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을 만나기 위한 또 다른 길을 찾기 위해 1833년 9월 29일 직예를 떠나 산서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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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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