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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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겨울에 조선으로 입국하려는 계획도 물거품이 되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21. 산서대교구청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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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대목구청이 있는 산서성 태원부로 가려면 가파른 산과 협곡으로 둘러싸인 태항산맥을 넘어가야 한다. 사진은 석가장에서 태항산맥 낮은 협곡 지대를 넘어 태원으로 가는 철로변 풍경.


험준한 태항산맥 가로질러 산서로 이동

저는 남경교구장이며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요청에 따라 북경으로 가서 동지사 일행으로 온 조선인 교우들과 만나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페레이라 주교의 제안대로 1833년 9월 29일 직예(直隸) 교우촌을 떠나 산서(山西)대목구청이 있던 산서성 태원부(太原府)에 가기로 했습니다.

직예 교우촌에서 머문 한 달은 억류와 다름없었습니다. 3주 동안 이질로 탈진한 몸을 추슬렀습니다.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니 중국인 신부와 교우들이 조선 국경까지 가는 저의 계획을 반대하며 감금하다시피 했습니다. 중국 역시 아직 가톨릭교회를 박해하고 있어 서양 선교사가 붙잡힐 경우 자신들에게 닥칠 화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국인 교우들에게 감금돼 있다는 소문이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에게 삽시간에 퍼졌고, 중국인 신부와 교우들이 페레이라 주교의 지시를 받고 저를 강제 억류했다고 와전되기까지 했습니다.(필자 주-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이 소문에 대한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1838년 11월 24일 경기도에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음의 글을 보낸다. “북경교구장 서리였던 남경교구장이 갑사 명의 주교의 여행을 방해하고 북경에 거의 도착한 갑사의 명의 주교를 죄수처럼 가뒀다는 말을 하고 글을 쓴 사람이 있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어느 정신 나간 중국인 신부가 한 달 동안 갑사의 명의 주교를 사제관에 붙어있는 작은 채소밭에도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자신의 숙소에 감금하다시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중국인 신부는 북경 주교 모르게 중국인 특유의 소심한 공포심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와중에 갑사의 명의 주교는 북경 주교가 쓴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만약 정부의 허락 없이 몰래 북경에 들어올 경우 시내의 못된 교우들 때문에 크게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산서로 우회해 서쪽 지방과 달단(만주) 지역을 거치는 길을 모색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행히 10월 1일 산서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는 안내인 한 명이 합류했습니다. 그는 페레이라 주교가 지원해준 사람으로 1832년 이탈리아 선교사를 호광(湖廣)에서 산서까지 안내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산서대목구청이 있는 태원부로 가는 길은 강남에서 거쳐온 화북평원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태항산맥(太行山脈)의 깊은 협곡과 가파른 산들을 가로질러야 했고, 민둥산과 협곡 속을 200여㎞ 걸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깎아지른 언덕 위를 기어올라야 했고, 그런 후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내리막길은 하도 가팔라서 불과 스무 발자국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굽은 길이 많아 노새가 끄는 수레가 두 번이나 뒤집혔습니다.

저를 비롯해 일행 셋이 다쳤습니다. 저는 “마차 안에서 타박상을 입고 마는 것이 행인들에게 들키는 것보다 낫다”고 위로하면서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래도 첫 번째 여행에 비하면 이번 여행은 즐거운 소풍 같습니다. 전에 평야지대에서는 허기가 져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 산악지대에서는 먹을 것도 있고, 게다가 저는 걷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만사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직예 교우촌에서 12일 만에 산서대목구청이 있는 기현에 도착했다. 사진은 산서대목구청 주교관이 있던 집터에 세워진 구급촌 성당 외관과 내부.


산서성 태원부 구급촌 산서대목구청에 도착

10월 6일 산서성 관문에 도착했습니다. 양편 산 사이 협곡에 자리한 세관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일행이 시키는 대로 색안경을 쓰고 비단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며 고관 행세를 했습니다. 마차에 책상다리를 하고 기품 있게 앉아있는 제 모습을 본 세관원들은 별말 없이 지나가게 했습니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관문을 빠져나갔습니다. 우리는 겁만 집어먹었을 뿐 다행히 별 탈이 없었습니다.

1833년 10월 10일 직예 교우촌을 떠난 지 12일 만에 우리는 산서대목구청이 있는 태원부에 이르렀습니다. 안내인 한 명이 앞서가 산서대목구장 요아킴 살베티(Joachim Salvetti, 1769~1843) 주교에게 저의 도착 소식을 알렸습니다. 작은형제회 출신 살베티 주교를 비롯한 산서대목구 선교사들은 모두 이탈리아인들입니다.

이 훌륭한 주교는 저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산서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재정 담당 중국인 신부는 “아이고, 도대체 남경 주교께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우리를 망하게 할지도 모를 주교를 보낸단 말인가”라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자 살베티 주교는 “그분은 하느님의 일을 하러 조선으로 가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피해가 닥칠 일이 뭐가 있겠는가”라며 안심시켰습니다. 마카오에서 복안까지 저와 동행했던 알폰소 디 도나토(Alphoso di Donato, 1783~1848) 신부 역시 “유치한 걱정거리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중국인 신부를 나무랐습니다.

산서 평요현(平遙縣)에서 16㎞ 정도 북쪽으로 가면 기현(祁縣)이 자리하고 있고, 기현 도착하기 1㎞ 전 큰길에서 왼쪽으로 700m 정도 들어가면 ‘구급촌(九汲村)’이 나옵니다. 이곳에 산서대목구 주교의 거처가 있었습니다.(필자 주- 오늘날 이곳 주소는 산서성 진중시 기현 성조진 구급촌 구서대가 천주당이다. 기현은 춘추전국시대부터 형성된 고대 도시로 서역으로 가는 교통 요지였다. 오늘날 북경에서 기현까지 고속철로 3시간 40분이면 당도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10월 10일 도착해 1년을 체류했다. 현재 구급촌 천주당은 중국 진중교구에 속해 있다. 지금의 성당은 2004년에 봉헌했다.)



‘여행 허가증’ 발급 거부한 페레이라 주교

저는 산서대목구청에 도착하자마자 산서 북쪽 지방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 만주를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필자 주- 이 길은 훗날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입국로의 주요 거점뿐 아니라 최양업·최방제·김대건 세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길로도 이용된다.) 저는 만리장성을 넘어 만주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허가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때마침 1833년 11월 11일 북경에 갔던 왕 요셉이 산서대목구청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저를 찾아 직예까지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되돌아간 후 다시 산서로 온 것입니다. 그는 제게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요동의 교우들은 주교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게 전갈을 보내 주교님이 이 여로에 나서는 것을 단념하도록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나로서야 이 영광스러운 과업이 성공하도록 주교님을 온 힘으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이 이 고장에 온 시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너무 조급하게 마카오를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왕 요셉은 제게 “요동 교우들이 저를 받아들이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고 확언했습니다. 그들은 페레이라 주교에게 “최근부터 달단 연안에 영국 배 여러 척이 나타났습니다. 몇몇 상인들과 선원들이 상륙했습니다. 황제는 그들의 상륙을 전혀 막지 않고 내버려 둔 관리들을 사형시켰습니다. 조선의 주교님께서 우리 고장에서 오래 머무르셔야 한다면, 우리가 위험에 연루될 것이 염려됩니다. 하지만 조선 교우들이 주교님을 조선에 맞이하는 데 동의한다면, 얼마간 주교님께 은신처를 제공해 드리는 것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과 글을 통해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예상대로 페레이라 주교는 저의 조선 입국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저는 페레이라 주교에게 여러 차례 ‘여행 허가증’을 요청했지만, 그 어떤 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페레이라 주교의 비협조를 익히 경험했습니다. 남경에서 산서대목구까지 오는 동안 이 지역 관할권자인 페레이라 주교가 허락하지 않아 미사는 물론 그 어떤 성사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저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가 중국 요동 지방 교우들에게 “자신의 편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신부도 받아들이지 마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산서대목구청까지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1833년 11월 18일 조선 교우들에게 편지를 써서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편지는 “이듬해인 1834년 겨울 조선으로 입국할 계획이니 맞이할 준비를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교우들이 북경에 오지 않았습니다. 조선과 중국 사이 국경 도시인 변문에서 여항덕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834년 겨울에 조선으로 입국하려는 계획이 어이없게도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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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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