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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델 주교, 조선어 문법책과 「한불자전」 편찬하며 조선 선교 준비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27.병인박해 이후 교회 재건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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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델 주교 사진.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병인박해로 다시 성직자 부재 시기 맞아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긴 시간 동안 이어진 병인박해로 조선은 다시 성직자 부재 시기를 맞았다. 1866년 9명이 순교하고, 3명이 탈출한 이후 다시 조선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은 꼭 10년 후인 1876년이었다. 그렇다고 이전에 조선 선교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으로 탈출했던 리델·칼레 신부는 상해에 머물렀는데, 칼레 신부는 병인박해 보고서와 함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하였다.

후에 조선대목구장이 되는 리델 신부는 병인양요 이후 상해에서 조선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선어 문법책과 「한불자전」 편찬을 시작하였다. 1867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3명, 마르티노(A.J. Martineau, 南, 1841~1875)·리샤르(P.E. Richard, 蔡, 1842~1880)·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들 가운데 블랑 신부만이 나중에 조선에 들어와서 리델 주교에 뒤이어 7대 조선대목구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 해에 리델 신부는 일본 나가사키의 프티장 주교로부터 조선인 표류인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마르티노 신부와 함께 건너갔으나, 그들은 제주 사람으로서 병인박해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래서 조선 선교사들은 다시 차쿠에 모였고, 만주대목구장이었던 베롤 주교의 요청으로 차쿠본당에서 중국인 신자들을 사목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리델 주교가 1887년 펴낸 「조선교회 관례집」 표지.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차쿠에서 조선 교회를 위한 시노드 개최

칼레 신부의 발의에 따라 5명의 선교사는 1868년 11월 21일부터 12월 8일까지 차쿠에 있던 성모설지전(聖母雪之殿) 성당에서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칼레 신부의 서한을 통해 이 회의에서 어떠한 내용을 다루었는지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의 재산문제, 조선어를 프랑스어로 표기하는 문제, 베롤 주교를 통해서 차쿠 인근 지역의 사목을 위임받는 문제, 배교자들에게 부과할 보속·혼배에 대한 문제 등 선교사들이 지켜야 할 규정 전반을 다루었다. 이러한 시노드를 통한 결과는 1887년에 간행되는 「조선교회 관례집」에 상당 부분 수용되면서 조선 선교사가 지녀야 할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

이들 선교사는 새로운 지침을 바탕으로 조선 선교를 다짐하면서, 차쿠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목활동을 펼치며 조선에 다시 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입국 경로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조선 신자들을 만나 배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도 고려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 5월경 ‘덕산 사건’이 벌어졌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로부터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에 있는 부장품을 가지고 협상하게 되면 조선과 통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독일인 묄러 선장과 함께 페롱·최선일 등의 안내를 받으며 남연군 묘가 있는 곳을 향해 아산만 입구까지 도착했다.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여 가야산을 통해 봉분에 이르러 한쪽 편을 파내기 시작했으나 다 끝내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남연군 묘 도굴에 실패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를 천주교 신자가 서양인과 내통하여 벌어진 사건으로 여겨 박해가 거세졌고, 최인서·이정식(요한)·양재현(마르티노)·이양등(베드로)·김종륜(루카)·허인백(야고보) 등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리델 주교가 1880년 지은 「한불자전」 표지.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1869년 조선대목구장으로 리델 신부 임명

병인박해로 조선대목구장 베르뇌가 순교했고, 이를 계승한 다블뤼 주교도 순교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대목구장이 공석이었다. 따라서 중국으로 피신했던 리델·페롱·칼레 신부가 차례로 조선 선교지 장상으로서 조선 교회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1869년에 교황청은 리델 신부를 조선대목장으로 임명하였다. 리델 신부는 조선 입국에 실패한 원인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조선 대목구장직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포교성성은 리델의 사양을 거부하였고 마침내 리델은 대목구장직을 받아들였다.

“내 목숨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가족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주어진 모든 미래는 단 두 낱말로 요약됩니다. 필요하다면 죽음까지 각오하는 헌신과 희생이 바로 그것입니다.”(1869년 12월 31일 가족들에게 보낸 새해 인사편지)

리델은 1870년 로마의 예수회 성당에서 주교품을 받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선교지로 돌아와 상해 대표부에 있었는데, 조선 교우를 만나 조선의 상황에 대해 듣고 조선 재입국을 시도하였다. 1876년에 블랑·드게트 신부가 먼저 조선에 들어가고, 리델 주교는 이듬해 두세·로베르 신부와 함께 조선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입국한 지 6개월이 지난 1878년 1월 28일 서울 자택에서 붙잡혔다. 약 5개월간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옥중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요청으로 중국 정부가 개입하여 그는 조선에서 추방당하였다. 이는 조선이 선교사를 사형시키지 않고 추방시킨 첫 사례가 되었다. 리델 주교는 중국에 도착한 뒤 바로 「한불자전」을 완성하여 1880년 요코하마의 레비 인쇄소에서 출판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도 조선어 문법이 담긴 「한어문전」을 간행하였다.

그때까지 조선 진출 거점을 요동반도 차쿠에서 일본으로 옮길 계획을 가지고 있던 리델 주교는 일본을 방문하였다가 갑자기 뇌내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나가사키·상해·홍콩 등지에서 요양하고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자 블랑 신부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리델 주교가 1881년 지은 「한어문전」 표지.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5개월간 심문 받으면서 옥중 기록 남겨

리델 주교가 남긴 옥중 수기에는 좌포도청의 구조를 그린 삽화도 있고, 감옥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묘사하는 글도 들어 있다. 거기에는 죄수가 세 부류로 구분된다는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여기 죄수는 대략 세 부류로 구분되는데, 첫째 도둑, 둘째 채무 죄수, 셋째 교우들이다. 세 종류의 죄수들이 각각 따로 갇혀있다. 그들 중에서 도둑들의 처지가 가장 비참하니, 내가 있을 때 도둑 죄수들의 수효는 약 30명이었다. 밤낮으로 그 발에 차꼬를 채워 두며, 거의 다 병이 들어 옴도 오르고 피부병도 생겨 썩은 농즙이 땅에까지 흐른다. 항상 굶주리기 때문에 탈진하여 움직이는 송장 같고 가죽과 뼈만 남아서 불과 몇 걸음밖에 걷지 못한다. ?채무나 다른 사건으로 옥에 갇힌 자들은 도둑들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다. ? 이들은 부모나 친척들과 서로 연락도 취하고 서신 왕래도 할 수 있다. ? 교우들은 도둑들과 같이 옥에서 음식을 얻어먹고, 외부와 상종도 할 수 없으나 차꼬는 채우지 아니하므로?.”

이 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세 부류 중 두 번째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교우들은 갑작스럽게 옥에서 교살되기도 하고 고문으로 죽기도 하였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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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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