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년 8월 31일 모방 신부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조선 교우들이 우리에게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국경지대에 정착해 지형을 조사한 다음 조선 입국을 감행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반면, 샤스탕 신부는 다소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미 국경까지 가본 경험이 있어 부질없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국경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겪은 경험들을 회고하면서 지나치게 뜨거웠던 자신의 열정을 산동 지역에서 중국인 교우들을 사목하면서 가라앉힌 모양입니다.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가시려고 하는 곳에서 돌아온 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의 말을 빌리자면, 하느님의 섭리를 앞질러 가지 맙시다. 조선 교우들이 오기를 기다립시다. 그들은 분명히 조만간 북경으로 올 것입니다. 성공할 희망이 어느 정도 있다면 제가 앞장서서 다시 행군에 나서겠습니다.”
저는 산서대목구장 살베티 주교와 선교사 한 명에게 모방 신부의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문했습니다. 살베티 주교는 “이같이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평범한 방법을 선택해야 하고, 교회 당국이 지시하거나 승인한 경우,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확신한 경우에만 특별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현명하게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처럼 중대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보기 위해 교황청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볼 때 모방 신부의 제안은 신중히 짜낸 모든 방법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 비로소 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1834년 9월 8일 드디어 왕 요셉이 산서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120일 동안 길 위에 있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는 제게 서부 달단에서 조선까지 가는 길이 하나 있음을 알려줬습니다. 만리장성은 늘 파수꾼이 지키고 있지만, 문을 통해 갈 수 있고, 오랜 세월로 무너진 성벽 틈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부 달단에 제가 안전하게 묵을 수 있는 장소 두 곳을 찾아 놓았다고 했습니다. 이들 지역은 프랑스 라자로회가 관할하는 곳으로 교우들이 저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동 곧 동부 달단에서는 어떤 교우도 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왕 요셉은 제게 또 하나 중요한 정보를 알려줬습니다. 중국과 조선의 국경지대인 만주 봉황성 변문에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음력 3월과 음력 9월, 음력 11월에 장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장이 설 때 변문에서 조선 교우들과 만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항덕 신부를 국경까지 수행했던 연락원이 “조선 교우들이 음력 11월이 아니라 음력 9월에 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자신 있게 자기에게 말했다고 보고했습니다.
후임 조선대목구장으로 앵베르 신부 추천
저는 왕 요셉의 보고를 들은 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달단의 서만자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미 서만자를 관할하고 있는 설 마태오 신부로부터 초대를 받은 상태이고, 마카오에서 이 선교지들 전체의 장상인 토레트 신부의 승인을 받았기에 지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있는 페레이라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주교님께서는 이토록 중요한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힘껏 저를 돕겠노라고 늘 약속해 주셨습니다.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주교님께서는 하신 약속을 거뜬히 지키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곧 북경으로 올 것입니다. 그들은 주교님을 크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교님께서 하라시는 것이면 뭐든지 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곧 달단으로 떠나려 하는데 선교사가 없을 때 제가 제 수행원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푸는 것만이라도 허가해 주시길 주교님께 간곡히 청합니다.” 편지를 갖고 북경에 갔던 왕 요셉은 훗날 서만자에서 만났을 때 “조선 사람들이 북경에 왔지만, 페레이라 주교는 그들에게 저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알려줬습니다.
산서대목구를 떠나기 전 제 후임으로 사천(四川)대목구에서 활동하던 앵베르 신부를 교황청 포교성성 극동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추천했습니다. 앵베르 신부는 모든 점에서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저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지 중 어떤 곳에서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조선을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조선은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매우 힘든 고통을 안겨줄 것이고, 또 프랑스 관할 선교지들에 혼란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포교성성에 편지로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선교사가, 그것도 최고의 선교사들이 저희와 함께 조선에 가려고 자기네 회를 떠나고 있고, 다른 이들도 그들을 뒤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이것을 지켜보기가 매우 난감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조선 선교지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앵베르 신부 같은 선교사를 사천에서 빼낼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조선 선교지를 청했다가 거절당하거나 여러 선교사가 조선 선교를 자원했다가 거절당한다면 통탄할 일입니다. 저는 많은 비탄스러운 일들을 겪고 있지만 이런 일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이번 일이 잘 매듭지어진다면 제 고통은 한결 덜어질 것입니다.··· 조선이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지지 않으면 저로서는 이 선교지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됩니다. 조선을 위해서는 경험이 많고 성숙한 선교사들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시련도 강인하고 용기 있게 이겨낼 사제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먼저 그들이 그들을 엄격하게 심사하는 현명한 지도자들의 손을 거치지 않는다면, 누가 그런 선교사들을 저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현재까지 저는 중국인 사제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일 의도가 없습니다.”
유럽인 선교사 3명, 조선 입국만 기다려
기뻐할 일도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님께서 저의 청을 받아들이셔서 1834년 8월 31일 저에게 아직 어느 교구에도 속하지 않은 조선 외 지역에 사제들이나 교리교사들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과 신학교들을 설립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교황님께서는 조선대목구에 있는 사제들뿐 아니라 조선대목구에 속한 모든 교우에게 고해성사하기 불가능할 경우 훗날 기회가 될 때 고해할 마음을 먹고 통회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는 특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선대목구 경계 밖에서도 10년 기한부 주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나쁜 소식도 있습니다.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가 1834년 9월 2일 제게 샤스탕 신부를 샴대목구로, 모방 신부를 사천대목구로 복귀시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유럽 선교사 3명이 한꺼번에 조선에 숨어 들어가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하는 소리가 들린다면서 모방ㆍ샤스탕 신부는 이전 소임지로 복귀하고 그들 대신 준비가 더 잘된 앵베르 신부가 조선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르그레즈와 신부는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너무 서두른다고 우려했습니다.
저는 산서대목구를 떠나 서만자로 가기에 앞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장상인 샤를 프랑수아 랑글루아 신부에게 편지를 써 지금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조선을 지원한 선교사는 유럽인 3명(브뤼기에르 주교, 모방ㆍ샤스탕 신부)과 중국인 1명 모두 넷입니다. 중국인 선교사(여항덕 신부)는 조선으로 입국한 지 9개월이 됐고, 저희는 이제 조선의 문을 두드려야 할 판인데, 조선에서는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는 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 사제들을 원하지, 유럽인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임금이 우리의 입국을 허가하기를 바라지만, 임금은 그럴 리가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입국을 위해 그들이 생각해 낸 방안은 실현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저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샤스탕 신부는 조선 국경까지 갔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들여보내 줄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바람에 중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모방 신부는 북경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의 존재가 박해를 초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서만자로 떠났습니다. 프랑스 라자로회 소속 한 중국인 사제가 그를 맞이해줬습니다. 이틀 후 저는 그를 만나러 길을 나서려고 합니다.··· 저희로서는 입장이 난감합니다. 전진해야 할까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간에 저희는 모두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을 결심이 돼 있습니다. 저희는 진지를 유지한다는 희망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는 절대 후퇴하지 않을 것입니다.”(브뤼기에르 주교가 1834년 9월 20일 산서대목구에서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