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함평군 농협은 고구마 농사를 짓던 농민에게 시중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고구마를 사겠다고 했다. 하지만 출고일이 다가오자 수확량의 절반 가량만 구매하겠다고 통보했고, 농협의 말을 믿고 수확량을 늘렸던 농민들은 망연자실했다. 억울함을 호소할 곳 없던 농민들은 성당 문을 두드렸고, 진상규명을 위한 기도회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른바 함평 고구마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자주적 농민운동의 씨앗이 됐다.
땅에서 땀 흘린 만큼 자라나는 농작물이 전부인 농민들의 삶은 가난하고 때론 억울했다. 살기 위해 투쟁하며 눈물 흘려야 했던 그들의 삶은 2024년에도 여전히 고단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까지 더해진 현실 앞에 농민들은 48년 전과 같이 성당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들의 아픔은 우리와 무관할까? 훼손된 농촌 공동체는 결국 우리의 밥상과 연결되기에 농촌과 도시가 함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 기후변화로 농민 시름 깊어져
지난 7월 8일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특히 충청남도와 경상북도는 농작물 피해가 컸다.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농사를 짓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솔티분회 김봉준 분회장도 지난 호우로 대파 농사를 망쳤다. 이틀간 집중적으로 쏟아진 비는 수확을 며칠 앞둔 대파 반 이상을 주저앉혔다. 맛에는 문제가 없지만 모양이 망가진 대파는 상품 가치가 없다는 게 김 분회장의 설명이다. 7월 12일 찾은 김 분회장의 대파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심어놓은 대파 반 이상이 누워있었고, 그나마 모양이 망가지지 않은 대파를 수확하기 위해 일꾼들은 분주하게 밭을 오갔다.
하루 동안 내린 비는 최대 190mm. 상주시에는 당시 산사태 경보가 내려졌다. 비가 집중적으로 쏟아지자 물이 빠지지 못해, 곧게 자라고 있던 대파가 주저앉고 잎이 꺾여 버린 것이다. 김 분회장은 “매년 여름이면 장마를 겪지만, 최근 3~4년 사이 장마 형태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장마 동안 골고루 내리던 비가 며칠간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 한 번에 내리는 비의 양이 많다 보니 논과 밭을 복구할 틈이 없어 한 해 농사를 망칠 수 밖에 없다는 게 김 분회장의 설명이다.
집중호우로 망친 한 해 농사
피해 수습 나선 농민 ‘망연자실’
특히 마늘과 양파, 우엉 등 뿌리작물을 생산하고 있는 솔티분회는 땅에 물이 고이면 뿌리가 썩어 그 피해가 더욱 크다. 우엉 농사를 짓는 솔티분회원 이재민(비오)씨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9월경 수확하는 우엉은 지금 모양을 갖춰 한창 자라는 시기인데 습기 때문에 우엉 중간에 골이 생기면서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땅 밑에 있어 상태를 알 수 없으니 정확한 피해량은 수확할 때가 돼야 알 수 있다.
수확량은 줄었지만 이미 심어놓은 작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인력을 줄이기도 어렵다. 김 분회장의 경우 농사철 한 달에 들어가는 인건비만 2000만 원가량이다. 큰 일교차, 집중호우 등 기후변화로 인해 작물의 수확량이 줄어들면서 김 분회장의 수입은 작년에 비해 50가량 줄었다.
■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하는 생명공동체
가톨릭농민회 회원인 김봉준 분회장은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땅을 살리고,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싶다는 신념으로 버텨온 시간이지만 농산물 가격은 떨어지고, 생산비는 오르면서 유기농법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김 분회장의 경우 농사를 시작하기 위한 밑천이 매년 3000~5000만 원가량 필요하지만, 수확량이 점점 줄어들면서 모두 빚으로 남았다.
지난 2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이 발표한 ‘농가 부채와 금융 조달 현황, 진단과 과제’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국내 농가들의 부채 평균 규모는 3564만 원이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평균 부채 2711만 원보다 853만 원 증가했다. 농가들의 부채 규모는 지난 2003년부터 2017년까지 2651만 원~2777만 원을 유지해 왔지만, 최근 5년 새 증가 폭이 크게 늘었다.
경영비 증가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 것은 ‘기상 여건 등으로 수확량 감소’(91)다. ‘농기계, 자재비 등의 가격 상승’(70.4), ‘임차료나 인건비 상승’(66.1), ‘병충해 및 자연재해 때문에 비용 추가’(57.9)가 뒤를 이었다. 농민들은 “농사짓기 쉬운 때가 언제 있었겠냐 싶지만 그야말로 농업 자체를 행하기 어려운 시절이 펼쳐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해마다 극심해지는 기후 재난
불합리한 농업정책에 시름 커져
생명공동체로 농촌 붕괴 막아야
농사로 먹고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7월 4일 ‘국민과 함께하는 농민의길’은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기후 재난 시대, 농민 생존권 쟁취와 국가책임농정 실현을 위한 7·4 전국농민대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국쌀생산자협회·전국양파생산자협회 등 8개 단체 회원 3000여 명이 참석했다.
집회에서 단체장들은 한목소리로 “기후 재난 시대를 극복할 근본 대책을 지금 당장 수립하고, 농산물 저관세·무관세 수입을 지금 당장 중단하라”면서 “농산물 가격도 지금 당장 보장하고 ‘양곡관리법’을 전면 개정해 쌀값을 보장해야 한다”라고 토로했다.
불합리한 농업정책과 기후재난이 더해져 농민의 삶은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놓인듯 보였다. 우리의 터전이자 근간인 농촌의 붕괴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김봉준 분회장은 10여 년 전 서울의 신자들과 교류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본당과 분회가 협약을 맺고 농번기에는 신자들이 농촌 체험을 하고 수확한 뒤에는 농민들이 서울로 올라가 농산물을 팔았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 건강한 소통을 했던 그 순간을 김 분회장은 “행복했다”고 말했다.
농촌과 도시가 함께 생명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서로 얼굴을 보고 고민을 나누거나 웃고 떠들며 함께하는 순간에 생명공동체는 시작되고 있었다. 제29회 농민 주일을 맞아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는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