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29. 조불수호조약과 종교자유를 향하여
조불수호통상조약문 필사. 가톨릭평화신문 DB
1876년 일본에 이어 유럽 국가와 조약 맺어
조선이 처음으로 외국과 정식으로 교류하며 개항을 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맺어질 때부터다. ‘강화도 조약’이라고 불리는 통상조약이 조선이 처음으로 외국과 맺은 조약이었다. 조약을 맺는 대신(大臣)조차도 이미 일본과 수백 년 통상(通商)하고 있는데, 도대체 ‘조약’이라는 것을 왜 맺느냐고 물을 정도로 조선은 외교면에서는 너무나 무지했다.
조선보다 좀 더 빨리 개항했던 일본은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의 방식 그대로 조선과 외교조약을 맺었다. 치외법권을 적용한 점, 조선 해안을 일본 항해사들이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게 한 조항들이 그러한 부분이다. 또 1876년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몰래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조일조약을 통해 개항장에 숨어들어 올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은 가능한 한 외국과의 교류를 피하려고 했으나, 세계 정세상 열강(列强)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유럽 국가와 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어서 영국(1882년)·독일(1883년)·러시아(1884년)·이탈리아(1884년)가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정작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일찍부터 접촉이 있었던 프랑스와는 조약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정부와 선교사들이 오랜 박해 기간을 겪으며, 천주교 신앙의 자유 조항을 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그토록 반대하고 탄압했던 천주교를 쉽게 용인하지 않았다.
조불조약에 앞서 조선과 영국이 새로 맺은 조약에는 4관 2항에 ‘영국인들이 그들의 종교(의식)를 자유롭게 거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즉 지정된 장소에서 외국인들의 종교의식 곧 그리스도교 예식을 허용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조불조약은 협상 과정에서 천주교의 자유를 용인받으려는 프랑스와 이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조선 측이 대립했다.
고종의 외교 고문 데니(Owen N. Denny)
천주교의 자유 용인받으려는 프랑스와 대립
긴 사전 협의를 거쳐 마침내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주(駐)북경 프랑스 공사인 코고르당이 전권 대신으로 조선에 도착했다. 이때 청의 위안스카이(원세개, 遠世凱)가 중재를 섰다. 프랑스 측은 ‘전교(傳敎)’의 허락을 조약에 포함하도록 요청했다. 외무독판이었던 김윤식은 허락할 수 없었다. 프랑스 측은 ‘전교 자유’가 어렵다면 ‘선교사의 보호’를 명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역시 천주교의 사안이므로 포함할 수 없고, 다만 선교사는 앞으로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답만 듣게 됐다.
협상을 시작했던 김윤식 대신 고종의 외교 고문인 데니(Denny)가 전권대신으로 협상에 임했다. 데니와 고종은 ‘전교 자유’ 문제에 대해 명시적으로 조약에 넣을 수는 없고, 암시적인 문구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여기서 바로 코스트 신부가 건의했던 ‘교회(敎誨)’ 곧 가르치고 훈계할 수 있다는 단어가 등장했다.
그리하여 거의 마지막 협상 때 ‘내지거주(內地居住)’를 포기하고 ‘교회(敎誨)’라는 단어를 넣을 수 있었다. 조불조약을 통해 선교사들은 두 가지 큰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제4관 6항 ‘프랑스인은 집조를 가지고(持照) 조선 각처를 여행할 수 있고’, 제9관 2항 ‘프랑스인이 조선에 와서 언어 문자·과학·법학·예술을 배우고 가르치면(敎誨) 모두 보호하고 도와줌으로써 양국의 우의를 돈독하게 한다.’
여기서 집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호조(護照, 여권)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곧 호조만 지니고 있으면 선교사들은 조선 어디든지 갈 수가 있었다. 이는 선교지 조선에 교우들을 방문하러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교회(敎誨)’는 가르친다는 뜻으로 쓰이면서 언어·과학·법률·예술 등으로 한정돼 있지만, 선교사 측에서 볼 때 ‘천주교 교리 등을 가르칠 수 있다’고 폭넓게 쓸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최초의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가르치고 훈계할 수 있다는 ‘교회(敎誨)’ 포함
그러나 조선 입장에서는 천주교를 가르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고, 천주교를 믿거나 전교할 자유가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바로 이 점에서 서로 해석이 달라져 후에 ‘교안(敎案)’이라고 불리는 천주교와 조선정부와의 갈등이 수년간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블랑 주교는 이 조약을 ‘프랑스 외교의 실패작’이라고 비판하면서, 천주교와 선교사·신자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음을 아쉬워했다. 더군다나 ‘조선인들이 꺼리는 책을 금지’한다는 명시적 조항 때문에 천주교 서적을 유통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은 이제 상복(喪服) 대신 수단(Soutane)을 입고 다닐 수 있었고, 여권만 소지하면 조선에 어디든 다니면서 교우촌을 방문할 수 있었다.
조불 조약이 맺어지고, 다음 해에 비준이 이루어지면서 조선 주재 프랑스 공사관으로 콜랭 드 플랑시가 지명됐다.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천주교에 신중히 접근해 조선에서 선교사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들고 마침내 천주교 금령을 철폐시키도록 노력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파리외방전교회 미알롱(A. Mialon) 신부 호조(護照, 여권).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블랑 주교, 성당 지을 토지 매입 적극 추진
블랑 주교는 이미 1882년 대목구장 직무대행일 때 서울 종현(명동) 등 지역에서 가옥을 구입해 학당으로 쓰거나 본당을 준비하는 토지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불조약을 체결한 1886~1887년경 종현 일대의 가옥과 대지를 많이 매입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종현본당, 곧 후에 주교좌 본당이 될 성당을 짓고자 하였다.
플랑시 공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 업무를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가 맡고 있었다. 1887년 11월 종현성당을 짓기 위해 정지(整地)작업을 시작했고, 다음 해에 허가를 받기 위해 토지 문서를 외아문에 보냈다. 외아문에서는 그 지역이 영희전(永禧殿)의 주산(主山)이고, 조선왕국의 땅이라며 문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외아문 독판 조병식은 베베르에게 교당(敎堂)과 학당(學堂)을 지을 수 있다는 조항이 조불조약에 들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성당 건립을 반대하는 편지를 썼다.
플랑시 공사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청나라에서 황제(도광제, 道光帝)가 천주교의 금령을 해제하였음을 예로 들어 조선에서도 그렇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조불조약에 명시되어 있지도 않고, 프랑스와 조선은 풍습이 다르므로 허용할 수 없으며 청나라하고는 별도의 문제임을 들어 거절했다. 그럼에도 블랑 주교는 토지 매입을 더 추진했고, 마침내 1890년 토지 소유권 서류도 돌려받게 됐다. 신교(信敎) 자유는 이렇게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