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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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완전한 자격 갖춘 두 선교사 극적 상봉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25. 서만자에서 모방 신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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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로 가는 만리장성의 마지막 관문인 장가구를 거쳐 고가영 교우촌 신자들의 도움으로 서만자로 갔다. 현 고가영 성당 전경.

1년 6개월 만에 선교 사제 모방 신부 상봉

대동(大同)에서 서만자로 가는 만리장성의 마지막 관문인 장가구(張家口)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장가구만 통과하면 달단 곧 내몽고 지역입니다.

대동에서 장가구까지는 걸어서 6일이 걸렸습니다. 이 성벽은 중국과 달단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쪽 산비탈은 청나라에 속하며, 북쪽은 달단에 속합니다. 러시아인들이 북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이 관문을 지키던 관원들은 아무도 저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러시아 사람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월하게 장가구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관문을 무사히 빠져나온 저는 장가구에서 약 3리외(12㎞) 떨어진 숭례현(崇禮縣) 고가영(高家營)으로 갔습니다. 이 마을은 서만자(西灣子)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가영에서 서만자까지는 약 7~8리외(28~32㎞) 거리입니다.

고가영을 중심으로 숭례현 일대에는 청 조정의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든 교우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필자 주- 고가영에서 서만자 가는 길에서 조금 빠져나가면 깊은 산 속에 숭례현 황토량(黃土梁)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청나라 박해 시대 교우촌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깊은 협곡 속에 숨어 있는 이 마을의 30가구 주민 모두가 가톨릭 교우다. 마을은 과거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은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지금도 황토량 교우촌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버리지 않고 척박한 땅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다.) 고가영 마을 길 오른편에 있는 집들은 모두 교우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성당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서만자까지는 고가영 교우들이 저와 저의 일행을 안내했습니다.

1834년 10월 8일 드디어 서만자에 도착했습니다. 산서대목구청에서 출발해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까지 17일간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모방 신부를 만났습니다. 극적인 상봉이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1833년 3월 9일 복안 주교관에서 저에게 사천대목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조선 선교를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교황 파견 선교 사제입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만에 조선으로 가기 위한 길목인 이곳 서만자에서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얼싸안고 말없이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완전한 자격을 갖춘 두 조선의 선교사가 처음으로 만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자체로 조선 교회의 완전체를 이뤘습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사도의 후계자인 교구장 주교가 있어야 하고 교우들과 함께 지속해서 성사가 거행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조선의 선교사가 중국 땅 서만자에 머물고 있지만, 분명 우리 둘은 조선 교회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고가영과 서만자로 가는 깊은 협곡에 자리잡은 숭례현 황토량 교우촌은 청나라 박해 시대 중국 교우촌의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황토량 교우촌 전경.

모방 신부와 함께 서만자에서 미사 봉헌

서만자는 꽤 큰 마을이고 거의 모두가 교우입니다. 이곳 교우들은 신앙적으로 열심하고 사제를 존경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만나기를 즐거워합니다. 서만자에는 성당이 하나 있는데 죽은 황제가 교우들을 유배 보내고 선교사들을 형장으로 보내던 때에 세워졌습니다. 이 성당은 금세 너무 비좁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지금 훨씬 더 큰 성당을 한 채 짓고 있습니다.

서만자 교우들은 매우 가난하지만, 자신들이 모은 기금과 동료들의 헌금으로 계획대로 하느님의 거룩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부유한 본당들이 자발적인 봉헌금을 가지고도 다른 이유로 해내지 못하던 일입니다. 지금 공사 중인 서만자의 새 성당은 백련교도들이 산서지방에서 어느 관리를 교살했던 바로 그 시기에 기공했습니다.

이 반란의 여파로 서만자 교우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불행한 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은 곧 평화가 회복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중국과 달단에서 안전한 장소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서만자가 바로 그곳입니다.

달단, 곧 내몽고는 지독히 추운 곳입니다. 위도가 겨우 41도 30분으로 프랑스의 여느 도시보다도 남쪽에 있지만, 폴란드만큼이나 춥습니다. 8월 말부터 서리가 내립니다. 골짜기는 1년 내내 얼음으로 덮여 있습니다. 바다에서 270여㎞ 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산이라 해도 해발 400~500m를 넘지 않습니다. 골짜기를 따라가면 서만자에서 북경까지 별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겨울에는 서만자 지역 기온이 영하 30℃ 이하로 내려갑니다.

저와 모방 신부는 교우들로 꽉 찬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곤 합니다. 제대 옆에는 화로 2개가 있습니다. 미사주가 얼지 않도록 뜨거운 물이 든 그릇에 중탕합니다. 이런 예방책에도 불구하고 성체와 성혈이 어는 것을 막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맨손으로 어떠한 금속 제품도 잡을 수 없습니다. 손이 조금만 축축해도 금속 제품은 쫙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가끔 손바닥 살갗이 벗겨지고 나서야 성작과 성반을 뗄 수 있었습니다.

밖에 잠시 나가 있어도 숨과 입김 때문에 턱수염과 콧수염이 얼어 손가락 굵기의 고드름이 붙어 있습니다. 어딜 잠시 다녀와도 모피로 안을 대고 어깨 위까지 내려오는 두건 같은 것으로 코와 귀를 감싸야 합니다. 이렇게 예방하지 않으면 동상으로 코와 귀를 잃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예방책으로도 콧수염과 턱수염이 얼어 서로 달라붙어서 입술이 마치 열쇠로 잠근 듯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입보다는 코로 숨을 쉽니다.
서만자는 겨울이면 영하 30℃ 이하로 내려가는 추운 곳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미사 때마다 꽁꽁 언 성작과 성반에 손바닥이 달라붙어 살갗이 벗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4월 중순 아직 얼어붙은 강바닥에서 자전거를 타고 즐거워하는 서만자 아이들. 멀리 보이는 성당 모습이 정겹다.

혹독한 추위에도 얼음 위에 무릎 꿇고 기도

제가 이렇게 보고하는 것은 모두 저의 체험과 다른 이의 체험을 근거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적도의 더위에 있다가 이렇게 추운 지방으로 삽시간에 옮겨 왔기 때문에 추위를 더 강하게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죽을 뒤집어쓴 채로, 또 하늘은 늘 맑고 태양은 빛나고 있기 때문에 추위의 강도를 거의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방 신부는 기후의 혹독함을 체감했습니다. 그는 영하 20~30℃를 유지하는 동안 내내 앓았습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온이 영하 16~18℃ 정도만 돼도 그들은 시원하다고 말합니다. 혹독한 추위에도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을 눈이나 얼음 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미사에 참여하는 이곳 교우들을 볼 때면 전율을 느낍니다. 이들의 깊은 신앙심이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프랑스 라자로회 소속 중국인 설 마태오 신부가 서만자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설 신부는 서만자에 예비 신학교를 세웠는데 같은 회 소속인 프랑스인 토레트 신부가 마카오에 세운 신학교에 학생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토레트 신부가 운영하고 있는 프랑스 라자로회 마카오 신학교는 1786년 그들이 북경에 세웠던 신학교를 1818년 마카오로 추방된 라미오 신부가 이전한 것입니다.(필자 주- 이 신학교는 1846년까지 많은 중국인 선교사를 양성했다.)

이들 신학생 가운데 신앙과 사제 성소에 뛰어난 이가 한 명 있습니다. 그는 산서 지방에서 외교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교우 상인 가게의 점원으로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기가 믿는 종교와는 다른 어떤 종교를 주인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교리 공부를 한 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례를 받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부모 품을 떠났습니다. 그는 집을 떠나 약 800㎞ 떨어진 서만자로 와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대단히 열심히 합니다. 그의 부드러운 성격과 예의 바른 태도는 그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금세 좋아하게 만듭니다. 그가 시작했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과 신학 공부를 계속한다면 분명 라자로회원들에게 좋은 선교사 한 명을 더 얻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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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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