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습이나 행동은 가치관에서 나온다. 제2회기 의안집도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교회의 모습에 대한 논의의 기반을 서문에서 다룬다. 이 부분은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신학적 논의 전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본론에서 다룰 구체적 실천 내용을 준비한다. ‘기초들’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언급된다.
1) 하느님의 백성이며 일치의 성사인 교회
2) 시노달리타스의 의미에 대해 공유된 의견
3) 다름 가운데 조화인 일치
4)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 호혜성
5) 회심과 개혁으로 부름받은 교회
시노달리타스의 의미에 대해 공유된 이해: 교회가 살아가는 ‘스타일’
의안집의 전망을 이해하기 위해 ‘시노달리타스의 의미’를 살펴보자. 이 단어는 쉽지 않은 개념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론에 기반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단어 자체가 너무 넓고 복합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삶과 활동’ 안에서 비로소 실제적 의미가 채워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수년간의 시노드 과정 동안 공통된 이해가 생겨났고, 의안집은 그것을 소개한다. 소개 방식 자체가 체계적이지 않고, 단순 나열식이기는 하다. 그래도 우리가 도달한 이해와 비교해 봄으로써, 시노달리타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제1회기 종합보고서는 하느님 백성이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가는 교회, 덜 관료적이고 더 관계적인 교회”를 희망한다며 시노달리타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온 인류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명을 지향하기 때문에 교회적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함께 모이는 것, 상호 경청, 대화, 공동체의 식별, 성령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표현하는 동의 형성, 그리고 분화된 공동책임성 안에서의 결정을 내리는 것 등을 포함한다.”(제1회기 종합보고서 1,8)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스타일’(6항)이고 그 기본은 경청이다. 경청은 단순히 ‘나 혹은 우리의 소리를 들어달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 자체가 ‘들음으로부터’ 오고, 이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로마 10,17) 우리는 말씀을 전해주는 성경과 교회의 살아있는 성전(聖傳)을 경청해야 하고,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권위에 따라 가르치는 교도권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특히 교회를 살게 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울려 퍼지게 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계시헌장 7항 참조)
그리고 성령께서는 신자들 안에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에 서로에게도 귀 기울여야 한다. 의안집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들은 것만을 선포할 수 있다.”(6항) 경청은 서문에서 다루는 ‘기초들’ 중 하나인 회심과 개혁의 내용이기도 하다. 내적 변화 없이 외적 변화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경청’이 시노달리타스의 의미 전체는 아니다. 경청이란 ‘함께 감’이라는 시노달리타스 여정에 있어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모습은 ‘들음’ 뿐만 아니라, 성찬례, 형제들의 친교, 교회의 공통된 사명, 곧 복음 선포 사명에 다양한 직무와 역할로 참여하는 데에서 드러나며, 이러한 참여가 보장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제도적 장치들에서도 표현된다.
시노달리타스, 일치의 성사인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
시노달리타스는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목표 수행을 위한 방식이다. 의안집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전체 인류 안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일치의 성사’로 규정한다. 이것이 의안집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과 ‘일치의 성사’는 별개의 개념은 아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말 속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성원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교회헌장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 이 ‘연결됨’에 근거해 의안집은 ‘관계들’과 그 상호의존성, 호혜성을 강조한다.
또한 교회가 일치의 성사라는 표현은 교회가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하느님 백성 구성원들이 일치의 ‘관계’ 속에서 ‘함께 살고 일하는’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때(표징), 교회는 온 인류를 그 일치로 초대하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도구). 이것이 ‘일치의 성사’로서의 교회가 의미하는 것이다.
일치, 다름 속에 조화
일치 문제는 ‘다름’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와 직결된다. 의안집은 ‘다름’,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복음은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동체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자리, 문화 등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성장하기 위한 ‘열쇠’다(11항). 일치란 다름의 제거가 아닌, ‘다름의 조화’다.(10항-12항) 이 다름은 삶의 자리뿐 아니라, 구성원의 은사, 직무, 소명에서도 인정돼야 한다.
호혜성,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의 특성
제2회기 의안집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단연 ‘관계’이며 그 특성은 ‘호혜성’이다. 다름 속의 조화라는 일치 개념과도 연관된 이 호혜성은, ‘함께 감’뿐 아니라 상호 의존, 상호 성장을 지향한다.(14항) 특히 여기에서는 제2회기에서 다룰 여성 관련 주제들이 열거돼 있다.(16항)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한편 의안집은 제2회기에서 여성 부제직에 대한 논의를 하지는 않을 것이며, 다만 시간을 두고 신학적 성찰을 계속할 것임을 밝힌다. 이 주제에 대해 충분한 연구도 아직 무르익지 않았고, 또 지역교회에 따라 찬반이 엇갈리기 때문으로 보인다.(17항)
또한 “남녀 평신도들이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동안에도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설교(predicatio)에 기여할 수 있도록 요청됐다”(18항)고 언급한다. 설교라는 단어가 강론보다 폭넓게 쓰이고, 교회법(766조)에는 평신도들의 경우 주교회의의 규정에 따라 성당에서 설교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전례 중 거행되는 설교는 강론(homilia)이라 칭하고, 강론은 교회 예배의 필수 요소여서 서품받은 이에게만 유보돼 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강론지침」 5항). 따라서 의안집의 표현을 평신도들이 미사에서 ‘강론할 수 있다’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설교에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시노드가 이에 대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시노달리타스, 공동체가 간과되는 개인주의와 개인이 소외되는 극단적 공동체 의식에 대한 대안
의안집은 시노달리타스 스타일이 인류에게도 영감과 통찰, 희망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20항) 왜냐하면 개인주의의 팽배와 개인의 고립 속에서 상호 돌봄, 상호 의존, 공동선에 대한 공동책임성, 그리고 관계맺음과 관련해서, 시노달리타스는 교회가 줄 수 있는 답이다. 이는 또한 개인이 무시된 극단적 공동체의식 앞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경청하고 함께 가는 모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는,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로서의 사명을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글 _ 최현순 데레사 교수(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