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이후 천주교 금교(禁敎) 조치가 점차 완화될 무렵, 블랑 주교는 교회 사업을 도울 수도회를 찾기 시작했다. 1885년 서울 곤당골에 집 한 채를 사들여 보육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이는 박해시기부터 있었던 ‘성영회(聖?會)’를 좀더 체계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약을 보급하기 위한 시약소와 양로원을 준비했는데,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 보육원과 양로원을 관리해 줄 수녀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88년 마침내 프랑스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출신 4명의 선교 수도자들이 조선에 진출했다. 수도회로서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것이다.
첫 선교 수녀들은 정동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 두 달여간 머물다가 종현의 보육원 구내에 있는 수녀원으로 이주했고, 코스트 신부의 지도와 배려 아래 적응하기 시작했다. 책임자인 자카리아 수녀는 살림 전반과 수녀원 운영을 맡았다. 에스텔 수녀는 보육원 여아를, 프란치스카 수녀는 남아들을 돌보았다. 중국인 비르지니 수련 수녀는 주방과 세탁 등을 맡았다.
블랑 주교는 외국인 수녀들을 초빙함과 동시에 한국인 수녀 양성을 진작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1888년 5명의 한국인이 지원자로 입회해 고아 100여 명을 돌봤다. 동시에 세탁과 바느질 등 고된 생활을 하며 수련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육체적 피로에 전염병까지 겹쳐 3명의 수녀가 병사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한국인 첫 수도자인 김해겸(쌘폴)·박황월(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수녀는 오랫동안 살면서 수녀회의 초석이 돼줬다. 이 가운데 박황월 수녀는 순교자들에 대한 많은 증언을 남겨 유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박순집(베드로)의 딸이었다.
학교 교육과 본당 선교·의료 사업 등 진행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처음에 언어와 문화·풍습 등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극복해 나가면서 차츰 기틀을 다졌고, 1894년에는 제물포에 분원을 설립, 시약소 운영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지속했다. 수녀들은 제물포와 약현·종현 등에 있는 여학교에 교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1909년 이후에는 북쪽으로 평양 관후리와 진남포·매화동, 남쪽으로는 제주도에까지 분원을 설립했다. 이로써 수녀회의 사도직은 학교 교육과 본당 선교·시약소를 통한 의료 사업 등으로 다양해졌다.
제물포에서 활동했던 쥴리엔느 수녀는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1897년 8월부터 8개월 동안 제물포 시약소에서 2623명의 외래환자를 진료했고, 275명의 환자를 방문 치료했다”고 보고했다. 그들의 의료지식을 전문의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라는 복음화의 실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샬트르 수녀회는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수공예 등 기본적인 교육을 하였으나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899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사도직에 착수했는데, 8월 제물포수녀원에서 여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수예와 더불어 기도문과 요리문답 등을 교육했으며, 신자 외에 외교인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학교가 바로 제물포 ‘박문학교’의 전신이 된다.
한불조약 이후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사들을 더 많이 요청해 교우촌을 중심으로 본당을 설립하고자 했다. 또 한국인 사제 양성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 김대건·최양업 신부 이후로 3명의 한국인 사제가 1896년 탄생했다. 강도영·정규하·강성삼 신부다. 점차 본당이 활성화되자 수녀회도 본당 사도직에 협력하게 됐다. 본당 사도직에 파견된 수녀들은 주로 본당 내 학교에서 기도문·성가·교리·가사와 함께 한글도 가르쳤다.
제의방 관리와 전례 준비는 물론, 학부모들의 상담자 역할도 해냈다. 황해도 매화동본당은 우도(Oudot, 1865~1913) 신부를 도와 양잠강습소에서 누에치기와 명주실 뽑는 양잠기술을 보급함으로써 주민들의 소득 증대에도 도움을 줬다. 이처럼 본당에서도 교육·시약소 운영·환자 방문 등을 통해 선교사도직을 수행해냈다. 수녀들의 본당 진출은 여성 권리 신장에 도움이 됐다. 본당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좋은 표양을 보여줌으로써 부모들은 안심하고 자녀들을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1911년 대구대목구가 분할될 때, 드망즈 주교의 요청으로 대구 수녀원을 설립하면서 더욱 확장하고 발전했다.
1909년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수도원 설립
뮈텔 주교는 한국인 신자들 교육을 위해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를 직접 방문해 선교 수사들을 초청했다. 그리하여 베네딕도회는 1909년 서울 백동수도원(백동은 현재 혜화동)에 자리를 잡았고, 1910년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세워 기술을 가르치는 실업교육을 시행했다. 이어 1911년에는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세워 사범교육에 나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의 탄압으로 이 학교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폐교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공·철공·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는 뛰어난 기능공이 배출됐다. 현재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제단에 있는 의자와 일부 제구는 당시 숭공학교 학생들이 제작한 것으로, 현재도 쓰이고 있다. 숭신학교는 교사 양성 교육을 했기 때문에 종교·윤리·교육학·문법·한문·일본어·역사·지리·수학·과학·음악·미술·체조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 사용하던 교과서를 보면 매우 수준 높은 교육으로 교사를 양성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교육정책에 의해 이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베네딕도회 백동수도원은 1913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됐고, 초대 아빠스로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가 임명됐다. 그러나 숭신학교의 운영이 좌절되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자 독일 출신 베네딕도회의 활동은 더욱 위축됐다. 연합국 소속인 일본과 프랑스에게 동맹국인 독일은 적국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의 탄압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견제로 베네딕도회는 새로운 선교지를 물색했다. 그리고 함경도와 북만주 지역에 진출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20년 원산대목구가 분리 설정됐다.
베네딕도회는 함경남도 덕원에 새로운 수도원을 건립해 1927년부터 덕원수도원 시대를 열었다. 처음 원산대목구는 함경도와 함께 북만주의 연길·의란(연길 북동쪽)까지 포함한 광활한 지역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 1928년 의란포교지와 연길지목구가 분할됐고, 원산대목구는 함경남·북도로 구역을 한정 짓게 됐다. 이 중 연길지목구는 계속해서 베네딕회가 담당했고, 의란포교지는 1933년부터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위임됐다. 이후 의란은 1940년 가목사(佳木斯)지목구로 승격됐다. 이처럼 일제강점기를 향해가는 와중에도 한국 교회는 새로운 선교회와 수도회가 지역별로 진출해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점차 발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