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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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음력 11월에 주교님 입국을 책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27. 교우 대표들에게 입국을 약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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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과 압록강을 건너면 의주 변문이 나온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압록강을 건넜다면 반드시 의주 변문을 통과해야만 한양으로 가는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 의주 변문 모습.


왕 요셉, 북경에서 조선 교우들과 면담

북경에서 저의 조선 입국을 훼방 놓은 방해꾼들을 쫓아낸 왕 요셉은 계속해서 조선 교우들과 면담했습니다.

왕 요셉 : “조선에 교우가 몇 명이나 됩니까?”

조선 교우들 : “수천 명이 되지만 정확한 숫자는 모릅니다.”

왕 : “그들은 모여 삽니까? 흩어져 삽니까?”

조 : “몇몇은 흩어져 있기도 하고 다른 몇몇은 모여 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교우들만 사는 마을도 상당수 있습니다.”

왕 : “조선 교우들 가운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 있습니까?”

조 : “여교우들 중에서 완전한 금욕을 서원한 동정녀들이 많이 있으나 남교우들은 그보다 적습니다.”

왕 : “신부가 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청년들을 몇 명 찾을 수 있을까요?”

조 : “있기는 하겠지만, 그 수는 대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 : “기도 공간은 있습니까?”

조 : “아니요. 교우들은 가정에서 기도합니다. 교우들과 예비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교리교사들이 있고, 젊은 여성들을 교육하는 동정녀들이 몇 있습니다.”

왕 :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습니까?”

조 : “몇 분의 유해는 모시고 있습니다.”

왕 : “요즘 천주교인에 대한 조정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조 : “전보다 더 나아진 것 같습니다.”

왕 : “중국인 여항덕 신부는 조선말을 잘합니까?”

조 : “아니요. 그는 고해성사를 서면으로만 받습니다.”

왕 : “대목구장과 여항덕 신부의 도착을 아는 교우는 몇이나 됩니까?”

조 : “여 신부님이 입국하신 것을 아는 교우는 200명이 되는데, 이 수는 고해를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교우촌 회장으로 있는 6명만이 주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6명 중의 4명은 주교님의 입국을 강하게 지지하고, 2명은 반대 의견을 가진 것 같습니다.”


저의 조선 입국을 지지한 회장들은 학자 1명, 군인 1명, 가난한 농부 1명, 동정녀 1명이었습니다. 이 동정녀가 영향력이 있는 모양입니다. 가롤로는 여항덕 신부가 곧 조선을 떠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 선교에 대한 저의 모든 희망이 4명의 회장 선의에 달린 셈이기 때문입니다. 가롤로가 왕 요셉에게 한 말에 의하면, 일본과 멀지 않은 조선 동남부 지방에 제 거처가 마련될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 변문에서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는 버드나무 가지로 담장을 쌓은 책문이 있다. 이 책문에서 의주까지는 120리 거리다. 책문은 조선 사신과 조선 교회 밀사들이 청나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자 양국의 자유무역지대였다. 「해동지도」 책문.


조선 입국 포기하고 되돌아가 달라 요청

1835년 1월 26일 왕 요셉이 북경에서 조선 교우들과의 면담을 성공리에 마치고 서만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여러 통의 편지를 가져왔고, 면담 결과를 알려줬습니다.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을 비롯한 조선 교우들이 제게 쓴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아직 주교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조선 교회는 평화롭습니다. 여항덕 신부도 건강합니다. 저희는 결실을 얻었고 은혜도 입었습니다. 저희는 여 신부를 안전하게 모시고 있습니다. 저희는 주교님의 입국을 받아들일 것인지 받지 않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희와 다른 모습과 피부색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국경을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중과 함께 있어도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님께서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시게 되더라도 복음을 전하고 성무를 집행하는 데 늘 위험이 따를 것입니다. 주교님의 신원이 발각되면 반드시 박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선에서 사목 중인 중국인 여항덕 신부와 저의 입국을 반대하는 2명의 회장 때문에 저의 조선 입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봤던 남이관이 쓴 편지에는 저에게 조선 입국을 포기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정말 맥빠지게 하는 편지였습니다. 유럽인인 저로 인해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그들을 연민하기보다 오히려 화가 났습니다. 조선 교우들은 그들의 주교인 저에게 보인 입장과 달리 북경교구장 서리인 페레이라 주교에게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남이관을 비롯한 조선 교우들은 페레이라 주교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주교님과 북경 교회의 모든 사제에게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주교님께서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전담할 목자 한 분 곧 여항덕 신부를 모시게 됐습니다. 저희에게 이 큰 은혜를 마련해 주신 분은 바로 주교님이십니다. 주교님께서는 비참하고 가난하고 모든 도움과 희망을 잃어버린 저희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저희는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만큼 순종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저희는 조선의 젊은이 한두 명을 중국으로 공부하러 보낼 것입니다. 주교님과 주교님의 사제들이 이 계획을 승인해 주신다면 저희에게 매우 유리한 일을 해 주는 것이 됩니다. 저희는 주교님께서 저희가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저희를 보호해 주시고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열망합니다. 저희 죄인 모두가 주교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하느님께서 저희의 큰 스승님이신 주교님을 지켜 주시고 온갖 복락을 풍성히 넘치게 해주시길 간구합니다.”

이 편지 내용처럼 조선 교우들은 제가 아니고 북경 주교를 자기네 주교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북경 주교가 승인하면 제가 물러날 것으로 확신한 것 같습니다.

조선에서 사목 중인 여항덕 신부 역시 페레이라 주교가 조선 교회에 대한 재치권을 가진 것처럼 인정하며 북경에 조선 신학교를 하나 세워 그들을 공부시켜 사제로 서품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직접 알게 하려고 여 신부와 남이관의 편지를 제게 보내줬습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제가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 조선에 대한 어떤 재치권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에 대한 합법적이고 유일한 재치권자는 자신이라고 확신한 것이지요. 그는 남경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후 단 한 번도 남경교구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도 여항덕 신부는 남경교구뿐 아니라 조선까지 다스릴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라고 합니다. 조선 선교지를 언제나 포르투갈인의 재치권 아래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드러나는 행동입니다. 교황청 포교성성 극동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는 여 신부의 판단을 바로잡으려고 그의 의사를 확인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가 포교성성의 결정을 얼마나 충실히 따를 것인지 곧 판별하게 될 것입니다.
 
유진길과 조신철·김 프란치스코는 1835년 음력 11월에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대인 변문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오면 조선으로 모셔가겠다고 약속했다. 동지사 사행도. 출처=한국국학진흥원


“조선 국경으로 가겠다” 편지 다시 보내

저는 조선 교우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저는 이 편지에서 조선 교우들이 저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썼습니다. 그리고 편지 끝머리에 “여러분의 결정이 어떠하든지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서 위임받은 임무를 다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음력 11월 중 조선 국경으로 가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교우 여러분은 스스로 청했고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보내주신 주교를 받아들일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수천 명이 되는 교우 중에서 적어도 한 명쯤은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북경에 있던 조선 교우들은 저의 편지를 면밀하게 읽었습니다. 그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대목구장이 관할 선교지로 들어가는 것을 말이나 충고, 혹은 그 밖의 다른 옳지 못한 방법 등으로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사실만으로도 파문될 것이라는 교황님의 교령이었습니다. 이 교령 내용을 인용했을 때 그들은 몹시 놀랐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의 편지를 받아본 북경의 조선 교우들, 곧 유진길(아우구스티노)와 조신철(가롤로)·김 프란치스코는 1835년 1월 20일 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제게 보냈습니다.

“내년 음력 11월에 주교님을 맞이하도록 책문의 교우들에게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그러니 주교님과 왕 요셉은 그 장소로 가셔서 주막 한 곳에 거처하고 계십시오. 신호로서 주막 문에다 ‘만신만복(萬信萬福)’이란 글을 써놓으십시오. 그리고 신호로 손수건 한 장을 손에 들고 계십시오. 그러면 저희 안내인이 주교님 일행을 알아볼 것입니다. 부디 주교님께서는 굳센 용기를 가지시고 절대로 조급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교님께서 중국 쪽 관문에 도착하시면 며칠 동안 기다리십시오. 그런데 아무런 위험 없이 저희를 기다릴 수가 있으실지요? 저희가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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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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