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1182~1226). 파티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온갖 세상의 즐거움을 누린 그였지만, 하느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만나면서 가진 재산을 모두 버린 후 그리스도를 따랐다. 특히 마태오 복음 10장 7-10절은 그의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말씀이 됐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런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부패한 교회 모습에 실망한 신자들은 프란치스코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소유 없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탁발(托鉢) 수도자 모습에 매료된 것이다. 삽시간에 수많은 이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르기 시작했다. 미치광이 취급을 받던 프란치스코는 어느새 제2의 그리스도라 불렸다. 영어로도 탁발 수도자는 형제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온 프라이어(Friar)라 부른다. 정주 수도회 수도자를 뜻하는 몽크(Monks)와 단어에서부터 정체성이 구분되고 있다.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지금 프란치스코를 사부로 모시는 형제들이 세상 속에서 소유 없는 삶의 형태로 복음을 살아가고 있다. 작은형제회는 특히 청원기 때 무전(無錢)체험을 하며 그 가치를 몸으로 받아들인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여름 무전체험을 떠난 작은형제회 청원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10)
사회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입회한 홍대화(요한 사도, 37) 수사, 다른 수도회에서 초기 양성기를 보내고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한 안상현(라우렌시오, 30) 수사, 올 4월 전역하고 두 번째 무전체험에 임한 이한빈(폴리가르포, 23) 수사가 이번 무전순례의 주인공이다.
말 그대로 무전(無錢)이다. 돈 한 푼도, 휴대폰도 없다. 오직 하느님 섭리에 내맡겨야 하는 9박 10일간의 여정이다. 걱정도 될 법하지만, 막 입회한 수사들은 ‘막연한 기대, 하느님 체험’ 등을 얘기하며 호기롭기만 했다.
하지만 이들은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각각 지하철 역·행궁·정자에서 노숙을 시도했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직 무더위가 찾아오지 않았던 6월 말, 밤 공기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웠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노숙을 했다는 홍 수사는 “그때부터 두려움이 몰려왔다”고 했다. 즉흥적인 성향이었던 안 수사도 “추위에 떨며 노숙한 이후로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두 번째 체험이라 여유롭게 출발했던 이 수사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전했다.
애긍(哀矜)을 청하는 일은 더 큰 난관이었다. AI를 논하는 시대에 무전체험한다는 학생을 누가 선뜻 반겨줄까. 더욱이 요즘은 이어폰 끼고 휴대폰을 보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거기다 말을 걸어야 한다. “죄송하지만 무전체험하는 학생인데, 표 하나만 끊어주실 수 있을까요?” 대부분 위 아래로 훑어보곤 무시했다. 마지못해 응하는 이도 “사지 멀쩡한 사람이 왜 이러고 있어?”라는 말을 덧붙였다. 세 청원자 모두 “지금 시대에 나 같아도 그럴 거 같다”고 크게 상처받진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럼에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계속 시도해야만 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이번 순례 목적은 ‘모든 곳에서 자유로운 하느님 체험’이었다. 덕분에 ‘하루에 애긍한 돈 모두 쓰기’, ‘전국 성지 방문하기’ 등의 기존 규칙은 없었다. 안 수사는 “규칙이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하루에 딱 필요한 만큼만 애긍이 됐다”고 했다. 다음날을 위해 더 욕심을 부리면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고, 절박한 상황에선 누군가 선뜻 도움을 줬던 경험을 나눴다.
홍 수사는 전부터 순례를 하고 싶기도 해서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어느 성당에서 우연히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입회 후 가졌던 답답함이 그 순간 뻥 뚫리는 경험을 했다고 전했다. 이후 무전체험도 모든 순간이 은총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그 신부님과의 깊은 대화로 주님과 성모님께서 저와 늘 함께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어요. 나이가 많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애긍이 쉽지는 않았지만, 부족한 만큼 이끌어 주시더라고요. 하루에 한 끼는 해결할 수 있었답니다.”
안 수사는 무전체험 중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까지 했다. 광주의 한 성당에 들러 미사 시간을 앞두고 성체조배를 하던 중 천장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오른쪽 맨 귀퉁이에서 홀로 기도 중이었던 안 수사가 있는 자리만 피해갔다. 그는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졌지?’ 하면서도 살아있다는 자체에 너무 감사함을 느꼈고, 더욱이 미사 시간 직전에 발생해 마음을 쓸어내렸다”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고 떠났다”고 했다. “절대 잊지 못할 하느님 체험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이 수사는 비교적 많은 호의를 받았다. 무전체험하는 학생이라고만 밝혔는데 청하지도 않은 밥을 사주기도 하고, 어렸을 때 자기 모습이 보인다며 본인 회사에 오라고 명함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제게 선뜻 도움을 주신 분들을 보면서, 훗날 더 어려운 이들에게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세 청원자는 이렇듯 소유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각자 체험 안에서 하느님과 한층 더 가까워졌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홍 수사는 사회와 사뭇 달랐던 올여름을 되뇌었다. “사회에 있을 때 휴가를 보내면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기만 했습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쉬고 있어도 출근 생각에 한숨만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무전체험 중 청평호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온갖 새와 벌레가 울고, 잔잔히 흘러가는 물에 해가 반짝반짝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더군요. 수중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오롯이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걸 버리고 하느님을 찬미했던 사부님의 모습이 이러지 않으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안 수사는 “프란치스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떤 상황을 맞이하든 그럼에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프란치스칸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무전체험을 통해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관 뚜껑에 문 닫고 들어가는 날까지 형제들과 지지고 볶고 지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습니다.”
이 수사는 무전체험 동안 우리나라 역사도 함께 둘러봤다. 부산 유엔평화기념관과 광주 5·18민주묘지를 방문해 희생자를 기렸고, 파주 통일전망대에 올라 북한 땅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생각보다 많은 분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았고, 분단의 아픔도 다시 생각했다”며 “프란치스칸으로서 이 시대에 억울하고 아픈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게 가장 큰 역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면서 섬기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저희는 ‘작은형제들’이잖아요.”
세상이 아무리 발전하고 삶의 형태가 변해도 복음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800년 전 복음을 글자 그대로 살고자 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사부라 부르며 따라나선 작은형제들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뜨거웠던 올여름, 그렇게 젊은이들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작은형제로 한 발짝 더 성장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