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최경환(프란치스코·1804~1839)와 복자 이성례(마리아·1801~1840)는 부부로, 큰아들이 최양업(토마스) 신부이다. 상반된 성격을 지닌 성인과 복자는 신앙 속에서 서로를 보완하며 박해와 가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우촌을 이끌었다.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현세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지향했던 성인과 복자 부부에 대해 알아본다.
불같은 성격의 성인, 지혜롭고 성실했던 복자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홍성) 출신의 최경환 성인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젊은 시절부터 성격이 불같았다는 것. 하지만 믿음의 정신으로 수없이 노력해 주위 교우들은 그가 성품이 원래부터 온화하다고 생각했다.
괄괄했던 성격과는 별개로 자비심과 박애심은 탁월했다. 성인은 자신의 깊은 신앙을 자비로운 행동으로 보여줬다. 수리산 교우촌(현 경기도 안양) 초대회장으로 활동할 때는 교우들이 금전 문제로 다투자, 자신의 돈을 모두 빚준 사람에게 준 일화도 있다. 헐벗은 사람만 보면 입은 옷을 벗어서 입혔고 시장에 가면 좋지 못한 물건도 일부러 사기도 했다.
이성례 복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다. 17세 때 최경환 성인과 혼인해 1821년 큰아들 최양업을 낳았다. 복자는 언제나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렸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했다. 남편인 성인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그를 존중하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갔다.
복자는 박해를 피해 자식들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모든 어려움과 궁핍한 생활을 신앙으로 기쁘게 참아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칭얼거리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이집트 피난 이야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던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전해진다.
포졸들을 극진히 대접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성인과 복자는 순교한 이들의 시신을 거두는 데 힘을 쏟았다. 최경환 성인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봤고, 이성례 복자는 성인의 뒷바라지를 하며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들이닥쳤다.
성인은 포졸들에게 “어째서 이렇게 늦었소?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중이니 좀 쉬어서 요기라도 하고 가시지요”라며 극진히 대접했다. 복자는 포졸들에게 줄 먹을 것을 마련하고 누더기를 입고 있던 한 포졸에게는 알맞은 옷을 건네기도 했다.
성인과 복자는 교우촌 신자 40여 명과 함께 서울로 압송됐다. 성인은 다른 남교우와 함께 맨 앞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그 뒤를 복자를 비롯한 여교우와 젖먹이들이 따랐다. 무더운 날씨에 함께 가던 아이들은 아우성을 치고 길가 구경꾼들은 온갖 욕을 퍼부었다.
옥중 순교한 성인과 참수형으로 순교한 복자
포도청에 도착한 부부는 서로 분리돼 투옥됐다. 포도대장 앞에 일행과 함께 끌려온 성인은 다른 이들보다도 더 혹독한 매질과 고문을 받았다.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으나 결코 신앙을 잃지 않았다. “혼자만 믿을 것이지 왜 남을 꼬드겼느냐”는 포도대장에게 “천주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이고, 천주를 섬겨 저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맞받아쳤다. 성인에게 가해진 모진 형벌에 살이 뜯겨 흰 뼈가 드러났다. 도저히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수준의 형벌이었다. 9월 11일 마지막 매를 맞고 옥으로 돌아온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숨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목을 잘리고자 한 것이 내 원이었으나 이대로 옥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바라신다면 그 뜻대로 될지어다.” 다음날 성인은 옥에서 순교했다.
복자 이성례는 젖먹이 아들과 함께 투옥됐다. 복자도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형벌을 참아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 힘든 건 감옥 바닥에서 굶어 죽어가는 젖먹이 아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남편마저 옥사하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 복자는 결국 배교해 풀려났다.
하지만 이내 큰아들 최양업이 중국에서 유학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시 체포됐다. 이번엔 재판관 앞으로 나아가 배교한 것을 용감하게 취소했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복자는 감옥에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모성애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던 것. 그렇게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복자가 자식들에게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
“이제 다들 가거라. 절대 천주와 성모님을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