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당신과 비슷한 생명체를 만들고 그를 사람(아담)이라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은 나체였고 죄 없는 순수한 몸이었습니다. 그는 본인이 벌거벗은 줄 몰랐다가 죄를 지은 후에야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끄러움 때문에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낙원에서 내치십니다.(창세 3,21-22참조)
아담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복된 사람이었다가 그분의 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하느님의 영을 되찾아주기 위해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인류를 구속(救贖)해 주시기로 하십니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사람은 먼저 새로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요한 3,1-5참조)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밤중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밤중에 찾아온 것으로 보아 바리사이파 사람들 몰래 왔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등을 눈여겨봤을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이콘 가운데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분은 옷을 벗고 있는데, 이는 죄의 가죽옷을 벗는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새로이 나야 하는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아담과 유사성을 띠어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한 모습대로 사람’(창세 1,26)을 만들기 원하시고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는 몸으로 인성을 취하셨으며, 낙원에서 내칠 때 만들어준 가죽옷을 벗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첫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 선택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분도 인간이었기에 모든 약점과 감정이 있었습니다.(루카 22,42; 요한 11,35,38) 죄가 없는 그분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배려하신 구원 계획에 동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배려하신 구원 계획과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그의 두 발은 ‘가다’(去)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 계획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유 의지’로 요한에게 가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오른손입니다. 그는 물을 축복합니다. 축복받은 물은 이제부터 생명수가 된 것입니다.(에제 47,1-9) 손가락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검지와 장지는 예수님의 인성과 천주성을, 약지와 새끼손가락과 엄지를 구부려 합하여 삼위일체이심을 표현합니다.
그는 세례를 통해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나오심으로써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승리해 나오는 기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자(略字) ‘IC XC’로 표현되어 있고 성령께서 그분 위에 강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후광(Nimbus) 안의 글자는 그리스 문자로서 ‘있는 나’라는 뜻으로, 이것은 탈출기에서 연유되었습니다. 모세가 “제가 당신께서는 누구시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여야 합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셨고,(탈출 3,14 참조) ‘있는 나’는 하느님의 이름이 되었습니다.(작품 1)
요르단 강과 바다
요르단 강물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항아리를 들어 물을 쏟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요르단 강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그는 물러서며 물을 쏟아내는데, 그 물은 생명의 물과 비교해 아주 적은 양입니다. 도도히 흐르는 물은 사가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상징합니다.
이에 관한 축일의 노래 중에 “바다야, 어찌 도망치느냐? 요르단아, 어찌 뒤로 돌아서느냐?”(시편 114,5)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 찬미가는 “강이 대답하기를 나는 태워 버리듯 강한 물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물러서서 특별한 뜻을 따르려 하는 분을 보고, 떨고 있다. 나는 아직도 순수한 분을 씻고 닦는데 익숙지 못하고, 죄 없는 분을 닦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다만 항아리의 지저분한 것을 쏟아버리는 것만 알고 있다”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물은 요르단 강이지만, 큰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물(말씀)은 동시에 바다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시간 사막에서 방랑한 것은 속죄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이 끝난 후 그들은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건너야 했던 홍해는 세례의 전조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요르단 강의 물 안에 동물이 있는데, 이것은 “너는 사자와 독사 위를 거닐고, 힘센 사자와 용을 짓밟으리라”(시편 91,13)를 연상케 합니다. 당시 주변 국가들의 토속적 신과 이방인 문화가 이미 퍼져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물에는 나름대로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이콘에서는 그들이 숭배하는 뱀이나 용들을 짓밟아 그들보다 위대한 분임을 은연중 나타내려는 듯합니다. 이 이콘에는 무늬가 있는 덮개를 쓰고 붉은 천이 있는 큰 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작품 1,2)
나무
왼편의 요한 세례자 아래 작은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에는 도끼가 걸려 있는데, 이를 ‘요한의 도끼’라 합니다. 그 나무는 작아서 아직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경고가 따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그러나 회개를 한다면 잘려나간 가지도 회생시킬 기회가 주어지고, 하느님의 사랑이 보일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로마 11,17-24)
이렇듯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이사 6,13) 여기서 그루터기는 새로운 삶을 싹 틔울 나무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 그 새싹은 만인이 쳐다볼 깃발이 될 것을(이사 11,10)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잘라버릴지라도 새싹이 나올 그루터기만을 남기는 사랑을 보이십니다.
이곳의 나무는 이미 잘리고 새로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으로 자라난 나무를 말합니다. 앞서 성탄의 이콘에서 요셉 뒤에 있는 나무는 이사이의 나무였는데, 그때는 작은 나무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생명의 나무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시작 단계이므로 이 나무는 아직 작은데다 열매를 맺지 않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두 가지로 자라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으로 오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미리 안 것 때문일까? 교활해서일까?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 틈에 끼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모습을 보고 요한 세례자는 경고합니다.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바리사이나 사두가이 사람들, 경우에 따라 율법학자들이 당시 위선자의 표본으로 신약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이 꼭 위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행실이 위선적인 모든 사람을 대신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를 칭찬하시는 예도 있고(마르 12, 34), 요한 복음서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보다는 유다인으로 대부분 대신하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