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교회에 대한 여러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사립학교령」으로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학교를 탄압하고, 「포교규칙」으로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한국 교회는 독자적인 문화활동과 신심 운동을 펼쳐나갔다. 1925년 시복식을 준비하면서 그해에 열렸던 바티칸선교박람회에 한국 교회에서 모은 800여 건의 귀중한 유물들을 보냈다. 이 유물들은 전시가 끝나고 바티칸 민족학 박물관에 보관돼 한국 컬렉션의 기초가 되고 있다. 79위 복자가 탄생한 이후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한 신심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문화활동과 한국 고유의 신심 발전에서 독립성을 지키는 데 보이지 않게 공헌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대목구에서는 교세의 확장에 따라 대목구 분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구대목구(1911)·원산대목구(1920)·평양지목구(1927)·연길지목구(1928)로 나뉘어졌다. 동경 주재 교황사절이었던 마리아 자르디니 대주교는 일본에서 지역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조선 교회의 주교들도 일본 공의회에 참여해야 할 것인지 질의하였다. 서울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다른 주교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조선은 독립적으로 지역 공의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응답하였다. 조선이 정치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관습·언어·종교적 전통·사목 방법 등 여러 면에서 일본과 다르며 고유한 사회적·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있으므로 별도의 ‘시노드’ 그룹으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사절 무니 대주교 ‘조선지역 공의회’ 소집
그러나 곧바로 조선공의회가 개회되지는 못했다. 평양지목구가 설정되고, 드망즈 주교의 병 치료가 끝난 1931년 곧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지역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그해 3월 27일 뮈텔·드망즈·사우어 주교와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신부(몬시뇰)·연길지목구장 브레허 신부(몬시뇰)가 모여 준비회의를 열었다. 이 시기에 일본 주재 교황사절 자르디니 대주교가 에드워드 무니 대주교로 교체되었다. 무니 대주교는 조선공의회 주재를 이어받았다.
교황사절 무니 대주교는 그해 9월 13일에 서울의 주교좌 성당에서 공의회가 열릴 것을 선포했다. 또 「경향잡지」를 통해 공의회가 성공적으로 거행되도록 신자들에게 당부하며 세 가지 사항을 요청했다. 첫째, 8월 15일부터 9월 25일까지 모든 신자가 미사 후에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암송하고, 계(복자 로렌조와 안드레아와 모든 치명자여)와 응(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을 세 차례 번갈아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주일과 축일의 성체 강복 때에 ‘성신강림송’과 ‘성모덕서도문’(聖母德敍禱文, 성모호칭기도)을 외우고 순교자들에게 전구하는 계-응을 이어 바치도록 하였다. 셋째,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자들은 매일 저녁 기도 끝에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한 번씩 바치고 순교자들에게 전구 기도하는 계-응을 똑같이 세 번 외우는 것이었다.
9월 12일 교황사절 무니 대주교가 참석하여 예비회의가 열렸다. 한국인 사제 2명(이기준·김양홍 신부)도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시노드에서는 원활한 진행을 위해 5개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교리·가톨릭 액션·사제와 신자의 규율·재무·지도서 준비 위원회였다. 서울에서 열렸던 이 시노드는 첫 번째 ‘조선지역 공의회’라고 할 수 있다. 의결권이 있는 주교들이 참석했고, 교황사절이 주재했기 때문이다.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다섯 가지 준수사항이 부여됐다. 곧 뜨겁고 항구한 기도·착실한 작업·완전한 자유·미숙한 조급함을 피할 것·절대적인 비밀 엄수 등이었다.
1934년 새 교리서 「천주교요리문답」 간행
1931년 9월 13일 장엄미사와 더불어 첫 회기를 시작했고, 다음날부터 분과위원회를 중심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했던 그 해에 교회에 대한 전반적 규정을 정리했고, 이듬해 6월에는 교황사절 무니 대주교가 공의회 교령을 공포함으로써, 한국 교회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지침과 방향들이 정해졌다.
이에 따라 새 교리서 「천주교요리문답」이 간행(1934)됐고, 회장 제도에 대한 규율, 즉 “1년에 두 번, 즉 가을과 봄에 공소를 방문해야 한다”는 오늘날 ‘판공성사’ 같은 제도들이 규정됐다. 성사에 대한 규정과 사제들이 지켜야 할 규율, 신심회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또한, 승인된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만을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교령을 바탕으로 다시 공동지도서(현 사목지침서)를 간행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해 초대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의 유해를 모셔와 용산성직자 묘지에 이장하기도 했다. 또 작은 병원이라도 짓자는 운동을 펼치면서 후에 성모병원을 설립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비록 일제강점기 탄압으로 종교활동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화활동과 신심 활동 면에서 한국 교회는 매우 독립적으로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지켜가면서 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 신자들이 함께 뜻을 모아 기도했던 성신강림송을 소개한다.
성신강림송
“임하소서 성신이여, 엎디어 구하오니, 하늘로서 네 빛을 쏘사 내 마음에 충만케 하소서. 너는 가난한 이의 은주(은혜로운 주님)시요, 고독한 이의 아비시요, 영성의 빛이시요, 근심하는 자의 위로시요, 괴로운 자의 평안함이시요, 수고하는 자의 쉼이시요, 우는 자의 즐거움이시요, 내 마음을 화하는 손님이시니, 임하소서 성신이여, 엎디어 구하오니, 마음의 더러운 것을 조촐케 하시며 마음의 마른 것을 적셔주시며 마음의 병든 것을 낫게 하시며, 마음의 굳은 것을 부드럽게 하시며, 마음의 찬 것을 덥게 하시며, 마음의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
빌지어다. 천주여, 예부터 너 믿는 자의 마음을 성신의 비추심으로 훈회(訓誨)하신지라.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또한 이 성신을 인하여 바른 것을 맛 들이고, 그 안위하심으로 항상 즐기게 하시되, 우리 주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