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박해 시대. 가장 가까운 가족의 지지 없는 신앙생활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성 이영덕(막달레나·1812~1839)과 성 이인덕(마리아·1818~1840) 자매, 복자 정광수(바르나바·17??~1802)와 복자 정순매(바르바라·1777~1801) 남매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했다. 성인과 복자 특집 연재 마지막 순서로 가정을 떠나 교회에 몸 바친 자매와 남매의 이야기를 알아본다.
가족 구성원의 반대도 꺾지 못한 신앙
성 이영덕·이인덕 자매는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매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 신앙을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다만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싫어해 세례도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 간 틈을 타 식구들과 함께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 성 이영덕에게 혼기가 다가오자 아버지는 외교인과 혼인할 것을 강요했다. 동정을 지키기로 한 성인은 꾀병을 앓거나 심지어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 보이기도 했지만 완고한 아버지를 꺾지 못했다.
복자 정광수·정순매 남매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빠인 정광수 복자가 일찍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가졌고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남매도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정광수 복자가 같은 교우였던 복자 윤운혜(루치아)와 혼인하는 것을 부모가 반대해 혼인 문서도 주고받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집안에서 교리 가르침을 지키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여동생 정순매 복자는 오빠 부부에게서 신앙을 배웠다.
본가를 떠나 신앙생활
성인 자매는 신앙생활을 싫어한 아버지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마찬가지로 신자였던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숨어 살았는데, 성 앵베르 주교는 세 모녀에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한 번 가출한 양반집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앵베르 주교는 그녀들이 살 집 한 채를 마련해줬다.
자매는 어머니를 모시고 조그마한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마음 놓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 곤궁과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또 주님께 감사하며 동정을 지켜나갔다.
복자 남매는 제사 참여를 요구하는 부모님을 떠나 1799년 한양으로 이주한다. 정광수 복자와 그 아내는 자신들의 집 한편에 건물을 짓고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모셔와 미사를 봉헌하거나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여동생 정순매 복자도 부부를 성심성의껏 도우며 교회에 봉사했다. 또 그녀는 동정을 결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허가와 혼인하였다가 과부가 되었다”며 과부로 행세했다.
남매는 교회 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일에도 힘썼다. 학식이 깊었던 정광수 복자는 교회 서적을 신자들 여럿이 볼 수 있도록 베끼는 일을 담당했고, 정순매 복자는 이 베낀 서적들을 보급하는 일을 맡았다. 정순매 복자는 동정녀 공동체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성인 자매와 복자 남매, 천주 품으로 돌아가다
성인 이영덕·이인덕 자매와 그 어머니는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기쁜 마음으로 자수하기로 마음먹었으나, 1839년 6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포도청에 잡혀 온 이들은 옥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무척 고생했다. 온갖 잔악한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형조에서도 새로운 고문을 가했으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괴롭게 한 건 고문이 아니라 옥에서 함께 고초를 겪던 어머니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1839년 12월 29일 언니 성 이영덕은 28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이듬해 1월 31일 동생 성 이인덕은 22세에 당고개에서 각각 순교했다.
복자 남매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될 것을 예상했다. 이미 정광수 복자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상태였다. 결국 그해 남매는 체포됐다. 그들의 용기는 형벌 과정에서 드러났다. 모진 고문 속에서 그 어떤 밀고도 하지 않고 버텼다. 특히 포도청은 여동생 정순매 복자가 과부 행세를 한 ‘요녀’(妖女)라며 배교하라고 위협했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정광수 복자는 1802년 1월, 여동생 정순매는 1801년 7월에 순교했다. 이들은 모두 고향 여주로 이송돼 참수당했는데, 고향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