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다. 대축일을 맞아 103위 성인 중 평신도 대표로 선정된 성 정하상(1795~1839)으로부터 평신도의 덕목을 배워본다.
성 정하상 가족은 아버지인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1760~1801)과 어머니 성 유조이(체칠리아·1761~1839), 이복형 복자 정철상(가롤로·?~1801) 및 친동생 성 정정혜(엘리사벳·1797~1839)까지 순교한 순교자 집안이다. 성 정하상은 회장 격인 지도자이자 활발한 사제 영입 운동과 복사 활동,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 작성, 순교 등으로 평신도에게 귀감을 준다.
우선 봉사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요즘, 박해 시대에도 지도자 역할을 한 성 정하상에게서 리더십과 책임감을 배울 수 있다. 1821년경, 약 27세였던 성인은 사실상 한국교회의 사무장 격이었다. 그는 성 현석문(가롤로·1797~1846), 복자 이경언(바오로·1792~1827) 등과 신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했으며, 거의 해마다 몇몇의 신자들을 데리고 북경을 오가며 여러 성사를 볼 기회를 줬다.
다음으로 성인이 중국까지 건너가 사제 영입 운동을 주도했다는 면에서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능동적인 순명의 정신을 따를 수 있다. 성 정하상은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는 등 계속되는 좌절에도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제 영입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지성에 힘입어 한국교회는 성 앵베르 주교(라우렌시오·1796~1839) 영입에 성공했다.
중국에서 사제 영입 운동…능동적인 순명 정신 실천
순교 전 제출한 상소문 통해 당당히 하느님 실존 설명
또 1839년 재상에게 보내는 상소문인 「상재상서」를 작성해 당당히 조정에 목소리를 냈던 성 정하상을 통해 신학적 지식에 대한 열정과 종교 간의 화합, 정치·사회 문제로의 적극적인 참여를 본받을 수 있다. 성인은 체포 후 포장 대리에게 제출한 「상재상서」에서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말하였다”라며 “참으로 충서, 효제, 인의예지가 모두 이 (십계) 속에 들어 있으니, 무엇이 티끌만큼이라도 부족한 것이 있는가”라는 말을 통해 천주교가 유교와 동떨어지지 않았음을 밝혔다. 또 충효 사상에서 오는 부모의 명과 임금의 명, 천지 대군의 명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며 “천주를 받들어 섬김은 구태여 임금의 명에 어기고자 함이 아니고 부득이한 데서 나옴이다”라고 하느님의 실존을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성인에게서 순교로 생을 마친 뜨거운 신앙을 배울 수 있다. 주리를 틀리고 톱질을 당하는 등의 고문에도 성 모방 신부(베드로·1803~1839)와 성 샤스탕 신부(야고보·1803~1839)가 있는 곳을 자백하지 않은 성 정하상은 마침내 1939년 9월 45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