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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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 (4) 성전 건립 유감(有感)

뚝심과 효심으로 이룬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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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허전함을 가눌 수 없는 처지에서 그렇게 성전 건립을 막상 결심하고 나니 앞이 막막했다.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가장 절박한 문제는 재원 마련이었다... 교우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봤지만 의견들이 신통치 않았다. 어차피 가난하고 노쇠한 어르신들만 있는 성당에서 교우들이 봉헌하는 신립금(성전건립기금)으로는 어림없을 것이고, 타본당에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빈손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유구에 특산품이 무엇이 있나... 오랜 시간을 궁리하고 탐색했다.

유구가 자랑할 거라고는 청정한 공기와 순박한 인심뿐인데 그걸 내다 팔수는 없는 것이고... 한참을 고민하다 보니 유구하면 바로 떠오르는 명품이 생각났다. 그래 이거다! 인견! 유구 인견! 왕년에 풍기와 쌍벽을 이뤘고 지금은 쇠퇴했지만, 아직 명맥은 유지하고 있으니... 그래 이것밖에 없다. 가장 확실한 특산품... 그래서 풍기에도 여러 차례 다녀오고 어떻게 원단을 만들고 판매를 하는지 둘러보았다. 어차피 원사는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문진으로 만들어 원단을 만들고 염색하고 문양을 넣어 기계로 짜거나(자카드) 누비는 것이다.
 

대전교구 유구성당. 정필국 신부 제공


처음에는 성당 건물이 무허가인 줄을 모르고 무너져가는 낡은 성당을 리모델링하고 교육관, 사제관을 신축하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예산도 5~7억 정도만 잡고, 물품 판매만으로 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선 내가 속해 있는 대전 교구 전 본당에 공문을 보내고 허락해 준 본당에는 교우들과 함께 가서 미사 강론과 물품 판매를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가 생각대로 만족스럽지 않고, 그래가지고는 10년이 아니라 20년도 더 걸릴 것 같고, 뒤늦게 성당과 사제관 건물이 무허가라는 것을 알고, 낡은 건물을 수선하는 것보다 이 참에 제대로 허가를 받고 완전히 신축하기로 방향을 돌리고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본당은 본당 나름대로 성전건립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신립금도 봉헌하기로 했다. 그리고 유구읍에서 몇 개 업체를 불러 인견 이불 제작을 논의했다. 그중 사람 됨됨이와 원단의 색상을 보고 더 선해 보이는 대표 쪽으로 결정하고 생산에 들어갔다. 직물업체에서는 중간 역할만 하고 생산은 대한민국 섬유 산업의 메카인 대구에서 염색, 생산하고 재봉은 서울에서 했다. 색상과 문양도 나의 남다른 눈썰미와 동물적인 감각으로 예쁘고 질리지 않는 문양과 색상으로 결정했다.

구역별로 판매조를 구성하고, 교구 내에서 신자 수가 많은 본당 중심으로 판매하다가 여의치 않아 서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신자 수도 많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 한결 성과가 좋고, 또 리모델링에서 성전 재건축으로 목표를 변경했기에 ‘신립’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문을 작성하고 봉투를 제작하고 보내고, 전화하고, 또 공문만 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본당 신부님과 약속하여 직접 방문해서 신부님을 만나서 본당의 열악한 사정을 설명했다. 내 상식으로는 그것이 예의이고 또 효과가 좋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진잠 성당(성전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재임 기간 내내 홍삼 장사를 징그럽게 했었던...)을 떠나면서 다시는 앵벌이(? 기금 마련을 위한 물품판매)를 하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며 두 번 세 번 다짐했던 그 일을 결국은 또 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공문에 담을 내용도 몇 번씩이나 뜯어고치며 다듬고, 발송한 후에는 해당 본당 사무실에 연락해서 수신했는지 확인하고, 언제쯤 본당 신부님을 찾아뵙겠다고 말하고 출장을 갔다. 주로 오전 미사와 다음 날 저녁 미사가 있는 수요일과 목요일 사이에 올라가서 사무실에 들러 본당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한번에 성공(?)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출타 중인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있어도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고, 만나도 본당 사정을 이유로(재정상황, 신자들 정서적 이유 등)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본당 신부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기금이 꽤 나올만한 본당은 5~6회 방문한 경우도 있었다. 수~목요일만으로 부족하기도 하여 어떤 때는 화요일 오전 오후 시간에 가기도 하고, 때로는 휴가를 이용하여 한 주간 전체를 본당 방문으로 다 채운 적도 많았다.

나는 아는 신부나 친분이 있는 신부를 가리지 않고 본당의 조건을 우선으로 해서 서울대교구의 경우 처음에는 6,000명 이상의 교세를 가진 본당을 중심으로 방문했다. 어떤 경우에는 생판 모르는 신부인데도 그 자리에서 ‘고생이 많다’며 흔쾌히 허락해 주는 신부님도 있었다. 그런 때는 참으로 놀라며 울컥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본당 사무실에서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무엇보다도 본당 신부님의 결정이 절대적이기에 어떻게든 본당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만나기가 어렵다 보니 새벽 미사를 본당 신부님이 봉헌하는 경우에는 그 새벽 미사에 뒤에서 참석했다가 미사 끝나고 나오는 본당 신부 앞에 ‘쨘~’하고 나타나서 인사하고 면담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어떤 때는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어 서럽기도 하고 자괴감도 들었지만, 그 옛날 굶는 자식들 먹여 살리려는 부모 마음(?...)이 들면서 줄기차게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끔찍한 일을 어찌해냈는지 자신이 대견하고 장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때만큼은 너무도 절박하였기에 눈에 뵈는 게 없는(?) 형편이었다.

많은 경우 본당 신부님에게 거절당하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에는 실망스럽지만, 나 같아도 그리 쉽게 허락해 주지는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허락을 받으면 그 날짜(주일)에 우리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해줄 신부님을 구해야 했다. 이게 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수리치골 성지가 있어서, 안식년을 지내는 신부님들이 미사를 봉헌해 주셨다. 토요 특전과 주일 교중 미사. 그러면 조직된 판매조는 미리 생산된 인견 이불과 파자마를 개서 불량품을 가려내고 정상 상태의 제품을 포장해놓고, 토요일 점심 후에 목표 본당으로 향한다. 트럭에는 이불과 파자마, 현수막과 테이블, 간이의자, 필요한 물품들, 신립서, 이불신청서 등등 … 그리고 가는 교우들은 본당 봉고차에 몸을 싣는다.

떠나기 직전 성당에서 해당 본당의 정보를 알려주고 (신자 수, 주임신부님, 주보 성인 등등)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강복하고 출발한다. 그 성당에 도착하면 성모상 앞에 모여서 시작기도를 바치고 주임신부님께 인사드리고 이른바 ‘셋팅’이라는 걸 한다. 내용인즉 주보에 신립서와 인견이불 홍보용지를 끼고 현수막을 붙이고, 탁자를 정돈하고 이불을 나르고 쌓고... 특전 미사부터 강론하고, 미사 끝나고 나오자마자 이불 팔고, 호객하고 삐끼하고...ㅠㅠ

대전교구 정필국 베드로 신부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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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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