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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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10월 20일, 조선 선교 꿈 이루지 못한 채 마가자에서 선종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33·끝) 마가자에서 선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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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

10월 7일 조선 국경 향해 서만자 출발

한 달만 걸으면 우리는 요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동 지방은 기온이 좀더 온화하지만, 주민들은 우리에게 거의 호감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 어떤 교우도 우리에게 임시 거처를 제공하려 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돈을 낸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들은 유럽인들을 끔찍이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좋건 싫건 외교인의 집에 거처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음력 11월 초에 우리는 장이 서는 국경지대 맨 끝 만주 봉황성 변문까지 갈 것입니다. 그러면 불가피하게도 수천 명의 외교인 가운데 외로이 있게 될 것입니다. 상인들에게서 금품을 뜯어내기도 하고, 또 외국인들을 조사하려고 일부러 거기에 주둔해 있는 중국 국경 수비대에 둘러싸이게 될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작은 막사 하나를 만들어 장사하는 척하겠습니다. 참을성을 가지고 조선 교우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들이 왔을 때 조선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아주 위태롭습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저의 길동무들은 용기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런 여행에 운을 맡겨 보겠다고 나선 사람을 3명이나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입니다. 게다가 저는 이 위험한 계획의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의 운명을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하느님 섭리 안에 제 한 몸 던져 중도에서 죽거나 불가항력으로 저지당하지 않는 한, 저의 달음박질의 종착지에 이를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위험들을 가로질러 달릴 것입니다.

다행히 국경 지대에 집을 장만하러 갔던 산서 회장 일행이 10월 1일 서만자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장이 서는 봉황성 변문에서 약 2㎞ 떨어진 곳에 넓은 집 한 채를 구했답니다. 때마침 산서대목구에서 저의 선교자금을 들고온 안내인 한 명이 조선 국경까지 동행해 주기로 했습니다. ‘장희’라는 분으로, 모방 신부도 인정할 만큼 ‘훌륭한 교우’입니다. 마가자(馬架子) 출신인 그는 저를 변문까지 안내하기 위해 산서성에서 약 590㎞ 떨어진 서만자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마가자에 있는 장희의 부모나 친척 집에서 보름 정도 묵을 예정입니다. 마가자에서 이 지역 관할권자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여행 허가증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의 허가증이 없으면 어느 성당이나 교우들 집에서도 묵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835년 10월 7일 조선 국경으로 가기 위해 서만자를 출발했습니다. 저의 일행은 중국인 곽 신부와 그의 복사 2명, 마가자 출신 장희, 국경 지역에 장만한 집을 알려줄 산서 회장,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왕 요셉 등이었습니다. 우리는 말 세 필과 수레를 구해 상인 행색을 갖췄습니다. 도적과 맹수들을 막기 위해 모두 완전 무장도 했습니다.

얼음장처럼 날씨가 추웠습니다. 추운 만큼 위험을 덜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서만자에서 박해를 피해 토굴 생활을 하면서부터 심한 두통을 앓고 있습니다. 서만자를 떠나기 2~3일 전부터 두통이 악화돼 구토까지 했습니다. 서만자의 신부들과 교우들이 몸이 좀 나아진 후 출발하라고 말렸으나 계획대로 10월 7일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다시 몸이 아프기 시작해 오호(五號) 마을 교우 집에서 쉬어야만 했습니다. 지독한 추위 탓이었는지 저는 어떤 음식도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잘 먹던 우유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위가 탈 났는지 무엇이든 먹기만 하면 토했습니다. 저의 몰골은 참혹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 미사가 거행된 곳으로 추정되는 마가자 성당 전경.

침상에 쓰러져 “예수, 마리아, 요셉” 찾아

오호 마을에서 이틀간 몸을 추스른 저는 일행과 함께 10월 10일 병약한 몸으로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15일 나마묘(喇廟) 마을에서 하루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걸어 19일에 교우 300여 명이 살고 있던 교우촌 마가자에 도착했습니다.(필자 주- 마가자는 오늘날 중국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 동산향이다) 우리는 장희의 친척 집에 머물렀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후 떠날 계획입니다. 집 주인은 묵을 방을 덥혔고 식사로 죽을 마련해 줬습니다. 다행히 저는 식사를 잘했습니다. 곽 신부와도 담소를 나누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별 고통 없이 잠도 잘 잤습니다.

사실 저는 조선 교회와 조선인 교우들을 위해 하느님께 저의 희생을 바쳐왔습니다. 그 희생으로 단식과 고신극기를 했습니다. 또 성모님께 날마다 조선 선교의 성공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했고, 특별 기도를 바쳤습니다. 산 이와 죽은 이 가릴 것 없이 프랑스의 친절한 교우들과 전교후원회 회원들을 위해 매일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20일 저는 오전 중에 독서를 하고 곽 신부와 대화도 했습니다. 일행은 제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안심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중국 예법대로 잠시 누워 있다가 일어나 더운물로 발을 씻고 면도도 했습니다. 그리고 변발을 다 땋아갈 때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습니다. 저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울부짖었습니다. 이어 침상에 쓰러져 프랑스말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찾았는데 이것이 육성으로 터져 나온 저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함께 있던 곽 신부가 놀라 저를 부축했으나 점점 의식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곽 신부는 서둘러 제게 병자성사를 거행했고 전대사를 베푼 후 임종을 돕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1835년 10월 20일 저녁 8시 15분 조선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제 영혼을 하느님께 맡깁니다. 교황 파견 조선 선교 사제들에게 가끔 “저는 외지 타타르에서 죽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 말처럼 타타르 땅 내몽골에서 고단한 저의 육신을 눕힙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20일 내몽골 마가자 장희의 친척 집에서 선종했다. 사진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소와 묘비.


▨ 끝말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은 서만자에 있던 모방 신부와 산서대목구장 요아킴 살베티 주교(Joachim Salvetti, 1769 ~1843)에게 곧장 알려졌다. 소식을 들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을 확인하기 위해 마가자로 달려갔다. 그는 11월 17일 마가자에 도착했고, 다음날 곽 신부와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이 모셔진 곳에 가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1835년 11월 19일 교우인 마을 주민 대부분이 참여한 가운데 모방 신부가 그를 위한 위령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모방 신부는 마을 공동묘지로 가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안장할 장소를 둘러봤다. 주교의 묘소는 교우들의 묘역 중앙에 자리하고 언덕 남향 기슭에 있었다. 장희가 이 땅의 주인이었다.

11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은 장희가 소유하고 있는 소성당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 미사가 봉헌됐다. 마가자와 인근에 사는 모든 교우가 참여한 가운데 연도를 시작으로 미사 전 예식·장례 미사·고별식·매장 순으로 장례 예식이 장엄하게 거행됐다.

장례 예식을 주례한 모방 신부는 장희와 그의 친척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에 묘비를 세워 달라고 부탁하고, 묘비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식 성(姓)인 ‘소(蘇)’자를 새기게 했다. 그는 또 교회에 위험이 되지 않으면 주교의 직책과 나이·사망 일시를 새겨달라고 부탁하고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다.

장희를 비롯한 마가자 교우들은 모방 신부의 뜻에 따라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탁수(鐸首) 소공지묘(蘇公之墓) 도광 15년 8월 29일립(道光十五年八月二十九日立)’이란 글을 음각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1835년 8월 29일(양력 10월 20일)에 선종하다”란 뜻이다.

조선 복음화를 위해 기꺼이 썩어 없어질 밀알이 되길 자청했던 브뤼기에르 주교. 그는 길 위에서 목숨을 잃은 무력한 인간이 아니라 스승 예수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한 그리스도의 증거자다. 한국 교회가 그의 시복시성을 청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주님의 제자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버리지 않고 그 양을 찾아 나선 착한 목자였다. 아울러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위해 스스로 마련해 주신 번제물, 바로 당신의 흠 없는 속죄양이었다. 그의 희생으로 한국 교회는 보편 교회 안에서 어엿한 하느님의 백성이 됐다.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부족한 글을 마무리하면서 “야훼 이레!”를 되새긴다. 그러면서 이 연재의 마지막 문장을 브뤼기에르 주교의 글로 마무리한다.

“나는 내 계획에 맞서게 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어려움에 대해 조금도 환상을 품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 어려움을 예상했던 것 같다. 그보다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리라는 사실마저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고 지루하며 고통스러운 여행에서 당했던 온갖 방해들에 대해서 나는 조금도 놀라거나 기가 죽지 않았다. (?) 우리가 조선 사람들을 만나러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로 우리를 맞이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서는 가서 그들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에서)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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