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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생활 70년… 은총이었네”

독일 출신 진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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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원 70주년을 맞은 진 토마스 신부. 2008년부터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화순분원에서 수도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오토바이 타고 비포장도로달려 사목...
평신도 신학 교육, 수도생활 중 가장 보람"



올해 서원 70주년을 맞은 진문도(토마스 모어, Joseph Wilhelm Timpte, 91,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화순분원) 신부. 한국에서만 60년 넘게 살았다. 약간의 경상도 사투리도 섞어가며 한국말을 맛깔지게 하는 독일 출신의 노(老) 수사 신부다.

역동의 시간 속에서도 70년간 한 번도 성소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진 신부. 사제로 수도자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온 이 시대 어른이 전해주는 이야기다. 최근 전라남도 화순분원에서 그를 만나 하느님 안에 살아온 세월을 전해들었다.



성소, 완전한 봉헌

1933년 독일 오버하우젠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진 토마스 신부는 깊은 신앙심을 간직한 교사 출신 부모에게서 올곧은 성품을 물려받아 자연스레 선교사의 삶을 꿈꿨다. 고등학교 때 당시 이름난 베네딕도회 출신 선교학 교수와 깊은 대화를 하고 진로를 결정했다. 베네딕도회에 입회한 이유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혼자보다 공동체가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53년 베네딕도회에 입회하고 이듬해 5월 첫서원을 한 진 신부는 “완전한 봉헌의 기점을 종신서원으로 보지만, 저는 첫서원 때 이미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다”며 “그 후 성소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느님 은총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네요.” 그렇게 진 신부는 첫서원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순종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서원 후 첫 소임은 공부였다. 로마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1957년에 종신서원, 1960년에 사제품을 받고는 한국 선교 발령이 났다. 아프리카에서 철학을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들은 예상치 못한 행보였다. 전쟁과 가난, 언어의 어려움이 예상돼 걱정이 앞섰지만 그는 순종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알려졌는데, 저는 우표 모으는 취미가 있어 이미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습니다.” 진 신부는 40여 일간 배를 타고 1962년 3월 10일 한국 땅을 밟았다.



순명의 삶

처음 본 한국 모습은 생각보다 더 가난했다. “부산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에서 창밖을 보는데, 초가밖에 없었습니다. 포장 도로도 없었지요. 그래도 재밌었습니다. 오토바이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사목했어요. 깊은 산속에 있던 공소에는 걸어 올라가기도 했고요. 지금은 상상조차 못 할 가난한 삶이었지만, 참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좋았던 시절도 잠시, 그는 33세에 수련장이 됐다. 진 신부가 수도생활 통틀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는 시기다. 10살도 차이 나지 않는 수련자를 외국인 신부가 지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는 서로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금 두 명 남았는데, 그래도 같이 늙어가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분들도 왜관수도원에서 가장 큰 어른들이고요.”

시간이 지나 1995년에 다시 한 번 수련장을 맡게 됐다. 그때는 영국에서 심리학과 영성신학 등을 배운 뒤라 훨씬 수월했다. 그렇게 진 신부를 거쳐 간 수련자는 15년간 100여 명에 이른다.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하면서도 순명이라는 이름으로 그 긴 시간을 감내했다.

 
진 토마스 신부가 보좌 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사목하고 있는 모습. 진 토마스 신부 제공
 
1963년 왜관 본당 보좌로 사목하고 있는 진 신부.  진 토마스 신부 제공

첫서원 후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진 토마스 신부.(가운데) 진 토마스 신부 제공


평신도를 위한 신학 교육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진 신부는 왜관 가톨릭신학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학원) 시절을 회상했다. 본래 수녀들의 신학 공부를 위해 시작했는데, 가끔 평신도들이 왔다. 그들의 열정을 본 진 신부는 1985년 직장인들을 위해 야간반을 만들었다. 당시 남자만 받으라는 주교의 권고가 있었지만 남녀 모두에게 열어뒀다.

“교리교사를 위한 교육은 있었는데, 평신도들을 위한 신학 교육은 한국에서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평생 순종만 하다가 제 의지대로 처음 해본 일이었습니다. 서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몰라요. 포항에서 일 끝나고 왔다가 수업 후 다시 돌아가는 분도 계셨고요. 고된 일을 하고 공부하려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수업 중에 꾸벅꾸벅 졸면서도 끝까지 들으려 하더라고요. 그렇게 7년을 가르쳤습니다. 제 수도생활 중 가장 보람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진 신부는 소소하게 그간의 기억을 꺼냈지만, 교회 내 굵직한 일도 많이 맡았다. 「200주년 기념 신약 성서」 번역에 참여했고, 수도승 생활·영성 전문잡지 「코이노니아」도 시작했다. 30년 이상 번역해 실었던 「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이 최근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특히 진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교회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산증인이다. 그는 “공의회 개최 소식을 듣고는 눈물이 났다”고 했다. 새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새로워질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다만, 60년 전 흘렀던 눈물이 아직도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시노달리타스를 하고 있는데, 그때와 방향은 비슷합니다. 변화는 계속해서 필요하고 모두가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과정에 말입니다.”

진 신부는 또 “수도생활도 위기라고 하는데, 위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국의 현대사도 함께한 그다. 진 신부는 “이렇게 단시간에 발전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라면서도 출산율 저하·높은 자살률 등 심각한 사회 문제에 대해 우려했다. “행복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인간은 욕망을 채울 때 행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고, 그걸 깨닫게 해주는 게 교회의 일이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도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면 더 나은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라치아

2008년부터 전라남도 화순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진 신부는 지금도 성경과 함께 「성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있다. 진 신부는 곁에 둔 규칙서를 펴고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읊어줬다.

“구원의 길을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을 나아감에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 계명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구원의 교훈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 수난의 인내로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손때가 잔뜩 묻은 규칙서는 첫서원 후 70년의 세월을 말해줬다. 진 신부는 규칙서를 닫으며 다시 한 번 은총의 시간을 되뇌었다.

“라틴어로 은총을 뜻하는 ‘그라치아(Gratia)’는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말입니다. 은총이라는 말에 다 표현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선물을 쏟아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성총(聖寵)이라고 불렀지요. 아직도 기도할 때 분심도 들고 어려워요. 그럼에도 수도생활은 그라치아입니다. 언제 불러주실지 모르지만, 있는 동안 계속 하느님 찬양하는 삶 살아야지요. 그라치아!”

박민규 기자 mk@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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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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