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전 병원’ 같은 교회에서 삶의 위로를 얻는 오늘날 청년들에게는 어떤 성소 동반이 필요할까. 사제나 수도자 성소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건 팍팍한 삶에 간신히 틈을 내 신앙생활을 하는 청년들에게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9월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청년 사목 관련 심포지엄 사전 조사에서도 ‘성소 등 헌신에 대한 일방적 권유가 조금은 부담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청년이 응답자 중 60가량이었다.
이에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이하 베네딕도 수녀회)은 지난해 1월부터 성소자 모임을 ‘베네딕틴 청년 모임’(담당 정경미 하상 수녀, 이하 베네딕틴 모임)으로 명명하고 청년들에게 고유한 카리스마를 전달하고 있다. 성소의 꿈을 꾸지 않더라도 기도, 공동체, 선교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베네딕틴 모임을 소개한다.
기존의 수도 성소 모임 형식 벗어나
청년들의 ‘동반자’로 청년 모임 운영
월 1회 모여 먹고 기도하며 일상 보내
■ 길잡이처럼, 동반자처럼
교회 안의 모든 단체 활동이 중단되거나 저조한 활동을 보이던 코로나19 시기, 수도회들 경우 감염 확산 위험과 성소자 감소로 젊은이들 모임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이에 수도회들은 성소 개발을 수도 성소에만 국한하지 않고 더 넓은 지평으로 교회 안 청년들이 각자 성소 찾아가도록 동반해 보자는 방향성으로 나아갔다.
베네딕도 수녀회도 오랜 기도와 숙고 끝에, 교회 안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그들 각자의 성소를 찾아가는 데 동반하는 것이 교회에 새로운 기여 방식이 될 수 있겠다는 데 의견을 모아 베네딕틴 모임을 새롭게 출발시켰다. 본당에서의 단체 활동과는 다른 방법으로, 베네딕도 수녀회가 지닌 고유 카리스마를 통해 청년들 영성과 신앙생활을 동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생활과 영성이 일치된 삶을 사는 수도자들이 만나 온 하느님을 소개해 준다면, 청년들이 험난한 현실에서 그래도 하느님의 손을 꼭 붙들고 순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베네딕틴 모임은 청년들에게 길잡이와도 같은 동반자처럼 다가간다.
참가자들은 수녀원 일상 안에서의 공동체 전례에 함께 참여하고, 매달 수녀들을 초빙해 관련 강의를 듣는다. 베네딕틴 영성과 성경 속 인물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명의식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확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성경통독 피정을 통해서는 청년들이 말씀 안에 힘을 받고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를 생활화하도록 이끌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모임은 꾸준히 진행돼 7명 청년이 꾸준히 참석하고 피정에는 15명까지도 함께하고 있다.
■ ‘혼자’가 아닌 ‘함께’로의 초대
“개인화해 가는 사회적 상황에서 청년들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협력해 더불어 사는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죠. 함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 그 기쁨을 누리는 기회도 과거에 비해 많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소외와 외로움이 크지만 함께하는 법을 모르는 정서적, 영적 위기가 크다고 할 수 있어요.”
모든 시간이 돈으로 계산되는 물질만능주의, 심각한 경쟁, 너무나 빠른 삶의 속도….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디고 사는 청년들에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보며 살아가기도 벅찬 시대다. 일상화하는 긴장과 갈등에 대응할 영적 역량을 키울 시간이 없어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자포자기하는 청년이 많다. 한국 청년 자살률은 2022년 기준 OECD 1위(22.6명)로 평균(10.6명)의 2배가 넘는다.
베네딕도 수녀회 공동체 영성과 환대의 영성이라면 청년들의 열병 같은 현실에 해열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베네딕도 수녀회 카리스마는 지금 여기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사는 삶이다. 그렇기에 베네딕틴 모임의 취지는 특별한 모임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를 만나며 기쁨을 같이 누리는 데 있다.
“라틴어 ‘베네딕투스’(Benedictus)는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에요. 베네딕틴 모임은 혼란한 세상 한가운데서 말씀과 함께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며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축복받은 청년’들과 동행하는 모임이죠.”
담당 정경미 수녀는 “수도 성소가 아니더라도 하느님께서 청년들 각자에게 불어넣어 주신 삶의 성소가 얼마나 반짝이는지 모른다”며 “그 길에 묵묵히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피난처가 되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기도, 공동체, 선교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사는 베네딕틴 영성이 더 많은 청년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다면 한다”고 덧붙였다.
■ 평범함이 안겨주는 위로
베네딕틴 모임에서 주로 보내는 시간은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먹고, 나누고, 노래하는 일이다. 복음서를 정해 며칠 밤 피정을 하고 다른 수도회나 수도회 활동지를 방문하기도 하지만 주된 일과는 ‘함께하는’ 일상에 닿아 있다.
“우리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함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가 베네딕틴 모임에서 느끼는 색다른 점이에요.”
사회에서 요구된 교육을 받고 자라 구성원으로 바로 서기까지, 성실하게 이곳까지 왔다고 여겼지만 실은 잘못된 자기강화를 해온 건 아닐까. 비교와 경쟁으로 소란한 주변에 더욱 정신없이 살아온 건 아닐까. 갈피를 잃게 하는 상념들은 수녀원에서 드리는 미사와 기도, 따뜻한 분위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특별한 부름보다는 우연한 기회, 부모님의 권유로 베네딕틴 모임에 합류한 청년이 많지만, 이렇듯 모임에 자연스럽게 이끄신 하느님의 숨결 덕에 오히려 무기력을 이겨낼 신앙의 빛을 찾는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소박한 밥 한 끼와 함께 영적 이야기를 나누고, 수도자들의 사려 깊은 조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치유가 찾아든다.
전한기쁨(제르트루다) 씨는 “사회 안에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많은 시선, ‘현실적으로 이 정도는 필요한 것 아닌가’ 하고 받아들였던 요소들을 베네딕틴 모임에서 많이 덜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전 씨는 “현실을 살면서 가톨릭 영성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주저앉을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수녀님들을 보며 ‘그래도 괜찮구나’ 하는 마음의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고백했다.
일상적인 만남이라는 이름의 가랑비에 내면의 옷이 촉촉이 젖는 베네딕틴 모임 청년들. 그들은 한목소리로 “내면의 평안,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회복했다”고 말한다. “공허함이라는 풍랑이 또 엄습하더라도 하느님과 수녀들과, 청년 벗들과 함께라면 순항하리라”는 믿음이 싹튼 것이다.
민예빈(루피나) 씨는 “수녀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동안 영적으로 냉담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며 “모임이 내게 주는 긍정적인 마음은 한 달을 의미 있게 살아갈 힘이 된다”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