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 성월, 그 누구보다 사람들의 기도를 그리워할 영혼들이 있다. 바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낙태아들이다. 모두에게 아픔이기에 되도록 있었던 흔적을 없애고 기억에서 지우기에 급급한 존재인 낙태아들. 그렇게 잊힌 이들을 위한 추모의 공간이 있다. 1994년 천주교용인공원묘원에 마련된 ‘낙태아의 묘’를 찾았다.
낙태아 위한 기도 공간…1994년 서울대교구가 조성
비문석 손상돼 올 4월 재설치…‘낙태 선택한 이들도 하느님께 나아가야’
‘낙태아의 묘’에 가다
천주교용인공원묘원(담당 김한석 토마스 신부) 주차장에서 왼쪽 도로로 100m가량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약 16㎡의 대지에 ‘낙태아의 묘 입구’가 새겨진 바위와 천사로 알려진 동상이 나온다. 낙태아를 위한 기도가 새겨진 비문석 앞엔 누군가 정성스레 두고 갔을 노란 장미꽃과 한 아름의 수국 두 바구니가 강렬한 태양으로 벌써 빛이 바래있었다. 이 태양 빛에 한 번도 눈부셔 보지 못했을 태아들을 위해, 이내 빛바래겠지만 나도 예쁜 꽃 한 묶음 가져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엔 ‘입구’라고 돼 있어 혹시나 싶어 수풀을 헤치고 계단 위로 더 올라가 보니 일반 산소들이 나왔다. 다시 낙태아의 묘로 내려와 비문을 찬찬히 읽었다. ‘태아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 안게 하소서’라는 부분이 와닿아 잠시 묵상했다. 그리고 소리 없는 비명 속에 사라져갔을 수많은 낙태아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세례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교회 전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도록 권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83항) 하지만 낙태아들은 이름도, 무덤도, 누군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없기에 그 존재를 유일하게 아는 이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려 기도하기란 어렵다. 때문에 추모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잠시 들러 낙태아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묘원 한켠에 만들어진 이곳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 낙태아들을 매장하지는 않았지만 속죄와 함께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상징적인 장소인 것이다.
또 다른 이름 ‘라헬의 땅’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을을 잃고 운다.”(예레 31,15)
낙태아의 묘는 서울대교구가 1994년 생명 존중의 의미로 조성한 곳이다. 교구 생명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이하 생명위)는 이곳을 ‘라헬의 땅’이라 부른다. 라헬의 땅이라는 명칭은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예레미야서의 라헬에서 따왔다.
미국교회는 1984년부터 낙태 후 치유 사목으로 라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생명위는 라헬 프로그램을 응용해 매달 낙태아들을 위한 피정 ‘희망으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 이를 통해 낙태 경험자는 그에 대한 상처를 보듬고 낙태아들을 애도하며, 이런 아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생명위는 2016년 자비의 희년부터 코로나19 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라헬의 땅 순례를 하고 있다. 올해도 교구 생명윤리자문위원회 위원장인 총대리 구요비(욥) 주교와 함께 생명 피정을 개최했다. 올해는 특히 손상돼 다시 설치한 비문석 축복식도 거행했다.
생명위 사무국장 오석준(레오) 신부는 “라헬의 땅을 통해 낙태를 선택한 이들이 아픔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다”며 “또한 생명을 선택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서 오 신부는 “현재 공백인 낙태법 여부와 낙태 가능 기간에 대한 논의를 떠나, 점점 낙태를 ‘임신 중단’이라는 단어로 바꿔 의미를 중화시키며 무분별한 낙태 수술 광고를 집행하는 세태가 문제”라며 “낙태를 경험했다면 죄책감에 머물지 말고 충분한 애도 기간을 거쳐 용서와 치유의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