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삶과 죽음을 묵상하는 위령 성월이다. 서울대교구에는 근현대 한국 가톨릭교회 주역들이 잠든 ‘묵상의 공간’이 있다. 135년 역사를 지닌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이다. 위령 성월을 맞아 용산 성직자 묘지를 찾았다.
한국 교회 근현대 71위 유해가 묻힌 곳
매년 11월 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 되면 이곳에 교구 사제단이 모인다. 위령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서다. 1961년부터 이어온 전통이다. 정성껏 묘지를 가꿔온 용산본당 공동체에는 중요한 연례 행사이기도 하다. 위령의 날을 하루 앞둔 1일, 묘지 무덤마다 화병에 조화가 꽂혀 있다. 올해부터는 참배객 편의를 위해 묘비 구석 한편에 묻힌 이의 사진을 붙여놨다.
묘비 글자는 시기에 따라 달리 적혀 있다. 라틴어와 한문 혼용에서 시작해 라틴어·한글을 거쳐 한글·한문으로 변화하는 양상이다.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고, 탁덕(鐸德) 대신 사제(司祭)를 쓰게 된 것도 이채롭다.
현재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된 유해는 모두 71위. △주교 4위 △신부 63위(부주교 6위 포함) △부제 1위 △신학생(시종품) 2위 △무명 순교자 1위다. 한국인뿐 아니라 프랑스인과 미국인·일본인도 있다. 출신을 떠나 같은 마음으로 한국 교회와 신자를 사랑한 이들이다.
묘지 옆에 조성된 돌담길은 2002년 용산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아 조성한 ‘생명의 길’이다. 순교자 후손답게 모든 형제자매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자는 의미가 담겼다. 올해 2월에는 기념비를 하나 세웠다. 6·25전쟁 당시 서울대교구 관할 지역에서 피랍·순교한 사제를 기리기 위해서다. 황해도 은율본당 주임 윤의병 신부 등 18명 이름이 적혔다.
새남터와 삼성산이 내다보이는 묘지
교회가 언제 이 땅을 묘지로 쓰기로 정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887년 3월 가까이 위치한 함벽정(涵碧亭) 터를 신학교 자리로 사들인 직후로 짐작할 따름이다. 1885년 경기 여주(당시 강원 원주) 부엉골에 세운 예수성심신학교 이전이 목적이었다.
당시 한국 교회는 100여 년간의 박해 끝에 제한되나마 신앙의 자유를 얻은 상태였다. 조불(조선-프랑스) 수호통상조약 덕이었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성당 등을 지을 토지를 매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용산 성직자 묘지가 들어선 삼호정(三湖亭) 부지도 그중 하나였다. 삼호정은 한강변 언덕에 있던 정자로, 안채는 삼호정 공소(용산본당 전신) 경당이 됐다.
삼호정은 원래 조선 시대 후기 여류 시인들의 모임 공간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다. 하지만 교회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멋진 풍광이 아니었다. 신앙 선조들의 넋이 서린 성지인 새남터와 삼성산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은 빼곡한 건물 탓에 묘지에서 새남터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기와지붕, 그것도 처마 일부만 건물 틈으로 보일 뿐이다. 아파트 숲 너머로 솟아오른 삼성산 봉우리가 보여 그나마 위안이 된다.
초반에는 성직자와 수도자 같이 묻혀
1889년 2월, 용산 성직자 묘지에 공식적으로 처음 안장된 이는 프랑스 여성 수도자였다.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초대 원장 자카리아 수녀다. 그는 한국에 온지 반 년만에 과로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샬트르 수녀회는 한국에 진출한 첫 수도회였다. 대목구 보육원·양로원 운영을 맡아달라는 블랑 주교 요청에 응해 이 땅에 왔다.
같은 해 4월 파리외방전교회 드게트 신부가 성직자 최초로 용산 묘지에 안장됐다. 이어 블랑 주교도 1890년 2월 21일 선종했다. 1876년 입국, 병인박해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자 14년간 헌신해온 그는 마침내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첫 주교 안장인 만큼 와서(왜고개)에서 구운 벽돌로 담을 쌓는 등 묘지 모습을 갖추려 했다. 하지만 아직 부실해 보였던 모양이다. 초대 주한 프랑스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는 블랑 주교 장례 후 본국에 보낸 보고에 이렇게 적었다.
“장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블랑 주교의 시신은 임시로 선교사들이 처형당한 들판(새남터) 가까이 용산 산등성이에 안장되었습니다.”
뮈텔 주교, 성직자 묘지 개발에 힘써
1891년 후임으로 부임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묘지 구색을 맞추고자 힘썼다. 하얀 석조 십자가를 세우고, 무덤마다 묘비를 놓았다. 높이가 중구난방인 봉분을 깎고 묘비석 높이와 맞췄다. 또 무덤 열을 맞추고, 철문도 달았다. 무덤 관리인을 둔 것도 뮈텔 주교였다.
현재 묘지 모습은 뮈텔 주교가 잡은 기틀 위에 본당 공동체가 수십 년간 정돈한 결과물이다. 석조 제대와 루르드 성모동굴·예수성심상·성 요셉상·성 김대건 신부상 등은 1973년 신자들이 기증한 것이다. 본당 출신 첫 사제인 남영희 주임 신부가 추진한 조경사업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뮈텔 주교는 1900년 성직자와 수도자 묘지를 분리하기도 했다. 이어 1910년 새로 마련한 수녀원 묘지는 성직자 묘지와 성심신학교 사이에 있었다. 용산 ‘두 묘지 시대’는 1982년 막을 내렸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유해 104위를 천주교 용인공원묘원 인근으로 이장했기 때문이다. 묘지 주변이 주거지로 변한 데다 토질이 좋지 않은 점을 고려했다.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이장
한국 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한 여러 선교사가 뮈텔 주교 재임 동안 용산 묘지에 안장됐다. 한국 첫 서양식 교회 건축물 중림동약현성당과 명동대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 그의 뒤를 이어 명동성당을 준공하고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 약현본당 초대 주임으로 25년간 헌신한 두세 신부,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을 위한 자료를 수집한 드브레 주교 등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단연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다. 현재 시복시성 운동이 한창인 ‘하느님의 종’이다. 3년간의 고된 여정에도 끝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브뤼기에르 주교. 그는 결국 1835년 10월 20일 내몽골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서 선종해 현지에 안장됐다. 뮈텔 대주교는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를 국내로 이장하기로 했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는 일제가 부설한 철도로 이어져 있었다. 마가자에서 심양역으로 옮겨진 유해는 9월 22일 기차에 실려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9월 24일 경성역에 도착해 명동대성당 지하에 모셔졌다. 그렇게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종 96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선교지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10월 15일 후배 사제들 곁에 안치됐다. 2년 뒤인 1933년 1월 뮈텔 대주교도 선종해 본인이 원하던 자리에 묻혔다. 대선배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옆이었다. 뮈텔 대주교는 용산 묘지에 안장된 마지막 주교였다.
1905~1983년 한국인 선종 사제 안장
1905년 이종국 신부를 필두로 한국인 성직자들도 용산 묘지에 안장됐다. 그 전통은 1983년까지 이어졌다. 교회는 물론 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인들도 여럿 잠들었다. 「돈키호테」를 번역하고 대영광송 기도문을 쓴 ‘최고의 종교 시인’ 최민순 신부, 첫 합창성가집 「가톨릭성가집」을 펴낸 교회음악 거장 이문근 신부, 가톨릭 대표 지성인이자 성모병원 안구 기증 1호 윤형중 신부, 우리말 꾸르실료를 처음 시작한 유수철 신부 등이다. 1984년 선종한 사제들부터는 용인 묘지에 안장되기 시작했다.
다만 용산 묘지 마지막 안장은 그보다 늦은 1987년이다. 그 주인공은 브뤼기에르 주교처럼 중국에 잠들어 있던 ‘하느님의 종’ 김선영 신부다. 만주에서 사목하던 김 신부는 1951년 ‘반혁명 분자’로 중국 공산 정권에게 체포됐다. 공산당이 조직한 애국교회 가입을 거부하던 그는 20년간 옥살이 끝에 1974년 강제수용소에서 선종했다. 어느 농장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훗날 알려져 사후 1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동료들 곁에 안장됐다.
반대로 용산을 떠난 사제도 있다. 1982년 안장된 평양교구 첫 사제 양기섭 신부는 5년 뒤 원주교구 배론성지로 이장됐다. 그는 황무지였던 배론을 10년간 공들여 어엿한 성지로 개발한 사제다. 윤을수 신부 유해도 선종 30년 만인 2001년 자신이 창설한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묘역으로 옮겨졌다.
남자 수도회로 처음 한국에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수사도 이곳에 있다가 이장했다. 1910년 1월 한국에 온 지 한 달 만에 병사한 마르틴 후버 수사다. 1909년 진출한 베네딕도회에 묘지가 없던 까닭에 그는 임시로 용산 묘지에 안장됐다. 1911년 방한한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그의 묘를 찾기도 했다. 후버 수사의 유해는 훗날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묘역으로 옮겨졌다.
용인으로 서울 성직자 묘지 옮긴 경위
용인 묘지는 원래 서울 명동주교좌본당이 1970년 매입, 4년간 개발해 사용한 곳이었다. 1978년 서울대교구가 인수하면서 운영권이 교구로 넘어갔다. 정부가 묘지 규제를 강화하려 하자 교구 차원에서 묘지 관리를 담당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공원묘원으로 재단장한 용인 묘지에는 1984년부터 선종 사제들이 안장됐다. 현재까지 안장된 교구 사제 수는 120명이 넘는다. 주교는 제10대 서울대교구장이자 ‘첫 한국인 주교’ 노기남 대주교를 필두로 4명이다. 제11대 교구장 ‘하느님의 종’ 김수환 추기경과 제12대 정진석 추기경, 그리고 김옥균 주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