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뮌헨 인근 암머호 동쪽 기슭 해발 700m에 있는 ‘거룩한 산’이라 부르는 곳으로 하이킹을 가려 합니다. 천 년 가까이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 바이에른에서 가장 오래된 순례지이자 나들이 명소입니다. 10여km의 완만한 코스로 편한 신발이면 충분합니다.
헤르싱 전철역(S8)을 나와 정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개울 옆 주택가 위로 마을의 오랜 상징인 상트 마르틴 성당이 보입니다. 그 언덕 아래 성모상이 순례의 출발 장소이자 종착지입니다. 표지판을 따라 길을 오르면 주택가가 끝나고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됩니다. 이따금 오른편으로 암머호가 반갑게 얼굴을 내밀어 주고,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향에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그러기를 30분, 숲이 끝나며 갑자기 초지가 펼쳐집니다. 하늘, 길, 순례자만 있는 광활한 메세타 평원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요. 저 너머로 목적지인 안덱스 순례성당 종탑이 보입니다. 이제 하이킹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고비인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길고 고달프지만, 주님께 갈 시간이 다 되어 돌이켜보면 한순간 아니던가요. 힘듦은 잠시, 이내 거룩한 산에 다다릅니다.
흰 외벽에 푸른 빛이 도는 구리로 씌운 양파형 종탑과 붉은색 지붕. 순례 성당의 외관은 바이에른의 여느 성당처럼 단아합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화려함에 눈이 부십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 거룩한 산이라고 부를까요? 그건 예수님과 관련된 성유물을 모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10세기 무렵 디센의 베를톨트 2세 백작의 선조가 예루살렘 순례에서 예수님이 쓴 가시관의 가시와 못 박힌 십자가 파편 등 여러 성유물을 구해왔다고 합니다. 백작은 가문의 터전을 암머호 서안 디센에서 안덱스로 옮긴 후 성을 짓고 1128년 소성당에 성유물을 모셨는데, 그 뒤로 순례가 시작됐습니다.
순례자 사목 위해 안덱스 의전사제단 설립
그 뒤 백작 가문이 프랑스 필립 왕의 살해 사건에 연루돼 가문이 몰락하면서 성유물의 행방이 150년 가까이 묘연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례는 이어졌고, 1274년 눈먼 여인이 이곳에서 시력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순례자가 더욱 늘어났습니다.
1388년 제단 아래서 나온 생쥐 한 마리 덕분에 사라진 성유물을 발견합니다. 성유물의 양피지 조각을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알아차린 거죠. 비텔스바흐 가문은 성유물을 뮌헨 성당들을 돌며 현시하도록 했는데, 이를 계기로 안덱스는 전국구 순례 성지가 됩니다. 1392년, 독일 땅에 처음 내린 로마의 대희년 대사(大赦)를 기념하여 약 6만 명의 순례객이 이 성유물을 공경하기 위해 안덱스를 찾았다고 합니다.
안덱스 성유물 중에는 베를톨트 2세 백작의 아들인 밤베르크의 오토 2세 주교가 로마에서 가져온 ‘세 성체(聖體)’가 있습니다. 두 성체는 6세기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미사 때 축성된 성체로서 성변화 후 핏빛의 십자가가 새겨졌다고 합니다. 다른 성체는 피로 물든 예수님의 모노그램인 IHS가 보이는 성체인데, 11세기 레오 9세 교황의 미사 때 성변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세 성체는 매년 성당 봉헌 기념일인 9월 마지막 주 주일 미사 후 성체 거동 행렬에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후기 고딕 양식 순례성당은 에른스트 공작이 1423~1427년에 세웠습니다. 공작은 순례자 사목을 위해 안덱스 의전사제단까지 설립합니다. 당시 교황청은 1450년 희년을 앞두고 로마뿐 아니라 유럽 각 지역의 순례를 적극 권장하였습니다. ‘거룩한 산’이란 이름도 이때 붙여졌습니다. 밀려드는 순례자를 위해 수도원은 여관과 식당을 운영했는데, 지금 수도원 비어가르텐도 이때 생겼습니다.
독일 최고 맥주 만들어 팔아 노숙자 보살펴
혹시 거룩한 산에서 맥주를 판다는 사실이 세속적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습니다. 1455년 교황의 칙령에 따라 안덱스 의전사제단 수도원이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바뀝니다. 이는 유럽 교회와 수도원을 세속권력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개혁하려는 흐름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문제는 수도자의 생계였습니다.
지금까지 안덱스 수도원은 세속영주의 후원으로 살았는데, 베네딕도회는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가르침에 따라 자급자족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안덱스 수도원은 처음부터 분원이 아니라 아빠스좌 자치수도원으로 출발했기에 주변의 다른 큰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브레히트 3세는 재정이 빈약한 수도원이 자립하도록 식당을 열어 맥주를 판매하고 유통할 특권을 줍니다. 이 일로 수도자들은 맥주를 양조해 판매함으로써 수도원 살림에 보탤 수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최고로 꼽히는 맥주가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신교와 가톨릭의 종교전쟁이자 근대의 세계 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은 독일을 참혹한 전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주변 성지를 순례하며 특히 성모님의 보호와 도움을 간구하며 가혹한 시간을 버텨냈는데, 안덱스도 성모 순례지로 거듭납니다. 특히 성당 한쪽 고통의 소성당에 모셔진 피에타상을 찾는 순례의 발길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제대 앞에서 세상의 십자가에 짓눌려 쓰러지지 않고 살아갈 힘을 주십사 기도하며, 온전히 자신을 내맡겼을 것입니다.
지금 안덱스 수도원은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 명소입니다. 생각해보면 600여 년 전 베네딕도회가 안덱스 순례 성지를 맡도록 한 사도좌의 결정 덕분이었습니다. 그 수입으로 지금 수도회가 뮌헨 노숙자를 보살피는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으니, 역사 속의 신비가 이런 게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