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9월 7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탄 마차는 뮌헨을 떠나 안개 낀 이자르강을 따라 남쪽으로 향합니다.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이탈리아 여행길이었습니다. 정오 무렵 괴테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호수를 낀 너른 평야에 길고 폭넓은 건물이 있고, 그 뒤로 눈 덮인 흰 암벽이 우뚝 솟아있었죠. 오늘 순례지인 베네딕트보이에른 수도원과 해발 1800m의 능선인 베네딕텐반트가 눈에 들어온 겁니다.
베네딕트보이에른 수도원은 알프스 넘는 길목에 자리한 가장 오래된 수도원입니다. 1273년 바이에른 최초로 성체 성혈 대축일에 성체 거동을 한 곳이지요. 740년 무렵 지역 귀족 란트프리트가 카롤루스 마르텔의 명에 따라 이곳 습지를 개간해 수도원을 세웠고, 보니파시오 성인이 학식과 덕망 높던 그를 초대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베네딕트보이에른의 노래 ‘카르미나 부라나’
1031년 테게른호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이곳에 정주하면서부터 번성기를 맞이합니다. 12세기 수도원은 금속세공과 세밀화로 유명했고, 한때 수도원 도서관에는 250여 편의 필사본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칼 오르프의 칸타타로 세상에 알려진 ‘카르미나 부라나’도 있었습니다. 중세 세속 시문학을 집대성한 필사본으로 중세인의 풍자와 유머, 지성인의 여유를 엿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모음집이죠.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을 이겨낸 뒤 17세기 수도원은 음악·수학·식물학을 가르치는 수도원 학교와 바이에른 베네딕도 연합회의 신학대학을 다시 열며 문화적 융성기를 이룹니다. 맥주 양조와 뮌헨-인스브루크를 잇는 우편 사업도 재개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합니다. 마을 500여 가구가 수도원 덕분에 먹고 살았고, 인근 호수에 노년의 수도자를 위한 분원도 세울 정도였습니다. 이런 경제력으로 1669년부터 수도원을 바로크 양식으로 새롭게 증축합니다.
괴테가 본 건 절정에 달한 수도원 모습이었습니다. 1803년 불어닥친 세속화 광풍으로 수도자들은 1000여 년의 활동에 마침표를 찍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수도원은 매각되어 광학 유리공장·군마 사육장이 들어섰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군인 막사·장애인 요양원 등으로 썼습니다. 1930년 살레시오회가 수도원을 인수하여 현재 청소년 교육기관 및 학술연구소로 쓰는 중이지요. 하지만 옛 유산은 그대로라 알프스 순례자들은 여기서 잠시 머뭅니다. 베네딕토 성인과 아나스타시아 성녀의 성유물이 모셔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단 위 바로크 시계가 던지는 메시지 “늘 깨어 있어라”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 성당에 들어서면 게오르크 아잠이 그린 ‘그리스도의 탄생’ 천장 프레스코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제단에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는 베네딕토 성인이 그려져 있고, 제대 아래에 팔 모양의 성해함이 보입니다. 카롤루스 대제가 프랑스 생 브누아 쉬르 루아르 수도원에서 모셔 온 베네딕토 성인의 오른팔 유해입니다. 이를 계기로 수도원은 알프스 이북의 중요한 순례지로 부상했습니다. ‘베네딕토 부라눔’, 즉 베네딕트보이에른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그런데 제단 맨 상단에 두 천사 사이에 커다란 시계가 눈에 띕니다. 미사 중에 분심이 들지 않을까 싶지만, 시계는 바로크 양식 성당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30년 전쟁의 암흑기를 지나며 표출된 바로크 미술에서 죽음은 묵상 주제였습니다. 밝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은 지옥같은 바깥세상에서 하느님을 찾아온 이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며 위로를 건네는 동시에 삶의 유한함·무상함과 곧 다가올 죽음을 의미 있게 준비케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독일에 간 김에 순례하는 우리에게 제대 위 시계는 늘 깨어있으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코헬호 기적의 아나스타시아 소성당
성당 뒤로 성 아나스타시아의 성해가 모셔진 소성당이 있습니다. 1606년에 처음 세워진 소성당인데, 1704년 일어난 기적으로 아름다운 로코코 양식의 보석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바이에른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면서 오스트리아군은 요지에 있는 알프스 산록 마을을 하나둘 약탈하고 습격합니다. 다행히 수도원 주변의 코헬 호수와 습지가 한동안 적군의 침입을 막는 천연방어벽이 되었죠. 그런데 1704년 1월 28일, 강추위에 전부 꽁꽁 얼어붙자 적군이 베네딕텐반트를 넘고 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때마침 아나스타시아 기념일 전날이어서 모두 아나스타시아 소성당에 모여 수도원을 지켜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날 오후부터 갑자기 푄(Föhn)이 거세게 불어왔습니다. 몇 시간 만에 습지가 녹고 빙판이 깨지면서 오스트리아군의 말과 수레는 난리가 났습니다. 당황한 군인들은 하느님이 수도원을 보호하신다고 여겨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1751~1753년 감사의 마음으로 새 소성당이 봉헌됐습니다. 코헬호 기적이 알려지면서 순례자들이 밀려들었는데, 성인의 성해함에 손을 얹고 기도한 뒤 두통이나 정신 장애로 고생한 이들의 치유가 많았다고 합니다.
알프스 지역은 날씨가 참 변덕스럽습니다. 겨울에도 갑자기 뜨뜻미지근한 푄이 불고, 한여름에 주먹 크기의 우박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2023년 여름 베네딕트보이에른도 큰 피해를 봤습니다. 푄이 그저 자연현상 아니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날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때로는 타이밍이 기적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