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남자 수도회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한국 교회 안에서 교육을 담당할 수도회를 애타게 찾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애국계몽운동으로 그리스도교계 사립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이 시기 개신교 주도로 세워진 사립학교 수만 해도 전국에 5000여 개나 됐다. 개신교가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 주된 이유는 선교였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학교를 운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뮈텔 주교는 가톨릭 학교 운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뮈텔 주교는 일본과 유럽의 여러 수도회와 접촉해 한국 진출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런 가운데 1908년 6월 로마를 방문한 뮈텔 주교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부) 장관 안토니오 고티 추기경에게 조언을 구했고, 고티 추기경은 그에게 상트 오틸리엔 주소를 적어주었다.
뮈텔 주교는 또 성 베네딕도회 로마 안셀모 수도원장 힐데브란트 신부로부터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라면 한국에 진출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 말에 뮈텔 주교는 로마 일정을 마치고 그해 9월 14일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을 방문한다. 그는 뮌헨에서 서쪽으로 약 40㎞ 떨어진 튀르켄펠트역에 내려 우뚝 솟은 수도원 종탑을 이정표로 늪지대를 걸어와 적막에 쌓인 수도원 문을 두드려 문간방 수사를 깨웠다. 독일어밖에 할 줄 모르는 문간 수사에게 뮈텔 주교는 프랑스어와 라틴말을 섞어 아빠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뮈텔 주교께서는 순교자의 나라 한국 선교에 거는 큰 희망, 그러나 또한 그 어린싹에 가해지는 미국 개신교의 무서운 위협에 관한 격동적 묘사를 통해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난번 결정을 번복했습니다.”(백동수도원 초대 원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 회고, 「분도통사」 40쪽)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은 뮈텔 주교의 설득도 한몫했지만 사실 1907년 로마에서 열린 베네딕도회 총연합 총재 아빠스 회의에서의 ‘아시아에 아빠스좌 수도원을 설립한다’는 결정이 큰 자극이 됐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한국 진출 결정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수도생활을 중심으로 한 선교 활동을 단행할 수 있게 됐다. 곧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한국 진출을 통해 베네딕도회 수도자이면서 선교사라는 이상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었다.
1909년 2월 25일 수도원 설립 선발대 도착
1909년 2월 25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신부와 엔스호프 신부가 수도원 설립 준비를 위한 선발대로 서울에 왔다. 그들은 곧장 뮈텔 주교를 찾아갔고, 그해 4월 말 사제 피정 때 조선의 모든 사제들과 만났다.
“서로 다른 공동체의 선교사들은 크게 달랐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젊었고 역동적인 발전을 이제 막 시작한, 또 바로 그런 까닭에 이래저래 위태로운 수도공동체 출신이었다. 이들은 교구 신부의 검소한 삶에 끼어들려고 온 것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옛날 수도원 같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한 건실한 중심을 건설하기 위해 뮈텔 주교의 초청으로 서울에 왔다. 그들은 수도원을 설립하고 성당·농장·작업장·기숙사와 체육관 등을 갖춘 사범학교와 실업학교를 운영해야 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인원이나 재정의 이유로 이룰 수 없었던 이 과업은 한국의 교회 생활에 획기적 전환점임이 분명했다.”(「분도통사」 72쪽)
두 수도자는 ‘온전한 베네딕도회 수도원 설립이 가능한’ 부지를 물색했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에 따라 토지 경작을 통해 수도원 생계의 상당 부분을 충당할 수 있어야 했다. 수도원과 성당·학교가 충분히 들어설 수 있고, 학생들을 위한 넓은 운동장과 수도원 농장·텃밭을 일굴 땅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한국인의 예민한 감정에 유의해야 했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통감부(후일 조선총독부)의 비위도 맞춰야 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한국인 중개자를 통해 수도원 부지를 매입해야만 했다.
두 수도자는 드디어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들어설 적당한 땅을 찾았다. 서울 동소문 백동 낙산(駱山) 아래 10헥타르(약 3만평)의 땅을 사들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의 정치뿐 아니라 정신 생활의 중심인 서울의 동쪽에 부지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면에서 이곳은 한국 정착의 이중 목적(수도원과 학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장소라 여겨진다.”(사우어 신부 1909년 10월 백동 수도원 설립을 위한 기부 호소문 중에서)
1911년 12월 27일 백동 수도원 축복식
수도원 부지 매입을 완수한 엔스호프 신부는 1909년 8월 8일 독일로 돌아갔고, 홀로 남은 사우어 신부는 수도원 건립을 위한 정지 작업을 서둘렀다.<사진 1> 그해 10월 20일 작은 임시 수도원 지붕 골격이 얹혔다. 12월 초 영하 15℃의 추위에 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 창문과 현관문이 완성됐다.
“성 니콜라오 축일에 성 베네딕도회가 마침내 새 수도원 건물로 이사했습니다. 작은 단층집입니다. 소박한 경당을 짓기에도 돈이 부족합니다. 작은 방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사우어 신부 1909년 보고서 중에서)
1909년 12월 28일 제물포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파견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하선했다. 안드레아 에카르트·카시아노 니바우어 신부와 파스칼 팡가우어·마르티노 후버·일데폰소 플뢰칭거·골룸바노 바우어 수사였다.<사진 2> 이들은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는 참으로 훌륭한 수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입회할 한국인 수도자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한국에 도착한 제1기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새해 1월 1일부터 수도 규칙에 따라 엄격하게 생활했다.
수도자들은 한국 진출 후 2년 동안 수도원과 학교를 짓느라 숨돌릴 틈 없이 바빴다. 먼저 목공소를 차려 건축에 쓰일 목재를 자족했다. 신선한 물을 얻기 위해 15m 깊이의 우물을 팠다. 대부분 교우인 일꾼들은 지게로 질 좋은 흙과 단단한 화강암을 부지런히 날랐다. 노력과 희생의 결과로 1910년 말 길이 40m, 폭 10m의 3층 건물이 드러났다.<사진 3> 갈수록 수도원을 찾는 교우들이 많아져 공사 과정에서 성당을 확장해야만 했다.
“작은 실개천이 솟아나와 두 언덕 사이로 졸졸 흘러 내려간다. 밤나무들과 채소 묘상들이 벌써 소출을 제공할 태세다. 거기 있던 작은 절은 소성당으로 탈바꿈했고, 한옥과 초가·오두막들은 숙소와 학교, 작업장과 외양간으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논밭으로 경작될 평지는 동쪽으로 멀리 펼쳐져 있다. 곧 조림될 산비탈은 학생들에게 쾌적하고 긴 산책로가 될 것이다.(「분도통사」 105쪽 엔스호프 신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