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독일 국경지대인 알자스 하면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떠올리는 분이 많을 겁니다. 정작 이곳 사람들에겐 작가가 부추긴 그런 국수주의 민족 감정은 없습니다. 17세기 들어와 두 나라의 경계가 한때는 보주산맥, 한때는 라인강에 따라 정해졌을 뿐, 이들은 천 년 넘게 그저 라인강 상류 평원에 살던 알레만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의식주도 언어도 비슷합니다. 다만 알자스가 로마 제국 안에 있어 오래된 포도밭 마을이 많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가장 유서 깊은 순례지인 몽생트오딜 수녀원을 소개합니다. 라인강 주변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해발 763m의 가파른 사암 바위산에 있는 수녀원이지요. 유럽의회가 있는 스트라스부르 출장이나 와인가도 여행 간 김에 들르기 좋은 순례지입니다.
몽생트오딜은 ‘성녀 오틸리아의 산’이란 뜻입니다. 성녀가 잠들어 있는 이곳 수녀원을 찾는 순례자들이 많아서 붙은 이름입니다. 오틸리아 성녀는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나 시각장애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습니다. 1807년 비오 7세 교황은 성녀를 알자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세례예식 중 눈을 뜬 오틸리아 성녀
10세기의 성담(聖譚) 「옛 오딜리아의 전기」를 보면, 오틸리아는 673~675년 무렵 알자스 오버렌하임, 지금의 오베르네에서 영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알자스 와인가도의 들머리에 있는 마을로 내비게이션에 몽생트오딜을 찍으면 이곳을 지나갑니다.
아달리히 공작은 딸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합니다. 자신이 하느님께 벌을 받아 생긴 수치스러운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궁 밖으로 아기를 빼돌려 처음에는 유모에게, 나중에는 수녀원에 맡겨 딸아이의 비밀을 유지합니다.
아이가 12살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멀리 레겐스부르크에서 에르하르트 주교가 찾아왔습니다. 알자스로 가서 눈먼 아이에게 ‘오틸리아’란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계시를 받고는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죠. 세례예식 중 성유를 바르는 순간 오틸리아가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딸이 살아있고, 세상을 보게 됐다는 소식이 아버지의 귀에도 전해졌지만, 아버지는 그냥 내버려 두라고 주위에 엄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아들이 어린 여동생이 궁 밖에서 힘들게 지내는 걸 안타까워 불러들입니다. 공작은 자기 명을 어겼다며 펄펄 뛰며 홧김에 아들을 때려죽이지요.
아달리히 공작은 뒤늦게 후회하고 오틸리아와 화해하지만, 딸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합니다. 오틸리아는 아버지를 피해 라인강 건너편으로 피신했는데, 이때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져 쫓기던 성녀를 숨겨줬다고 합니다. 결국 공작은 딸에게 호엔부르크 성에 수녀원을 짓고 살도록 허락했습니다. 그 수녀원이 지금의 몽생트오딜 수녀원으로, 오틸리아 성녀는 초대 원장으로서 130여 명의 수녀를 이끌었고, 산기슭에 니더뮌스터 수녀원도 세워 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수녀원의 전성기는 12세기 후반이었습니다. 1153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바로사 황제는 성녀 무덤을 참배하고, 서임권 논쟁의 희생양이 됐던 수녀원들을 재건합니다. 지금 로마네스크 양식의 소성당들은 그때 지은 겁니다. 헤라트 폰 란츠베르크(1167~1195) 수녀원장도 문화사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깁니다. 그녀는 수도자를 교육하고자 여성 최초로 백과사전인 「기쁨의 정원」을 집필했는데, 336점의 세밀화가 실린 당시 신학, 세상 지식을 집대성한 역작이지요.
산 정상의 수녀원은 붕괴와 재건의 과정을 쉼 없이 겪었고, 정주하는 수도회도 계속 바뀌었습니다. 알자스에서 눈에 확 띄는 상징적 장소여서 전란 중 늘 희생양이 됐기 때문입니다. 산불도 큰 적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여진이 가라앉은 1853년부터 스트라스부르 교구가 인수해 현재 컨벤션센터와 호텔을 운영하며 순례 사목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빛을 찾는 순례자의 휴식처
역사적으로 수많은 순례자가 몽생트오딜을 찾아왔습니다. 레오 9세 교황으로 선출된 브루노 주교도 있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왕들도 있었습니다. 옛날처럼 니더뮌스터 수도원을 지나 이교도 산성을 따라 정상 수녀원까지 5~6㎞를 걸어 올라오는 순례자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차로 순례합니다. 198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그렇게 순례하셨지요. 200대 이상의 차를 수용할 만큼 주차장이 넓습니다.
수녀원 정문을 지나면, 안뜰에는 순례자들로 가득합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성모승천성당 안 무덤 소성당에 성녀가 잠들어 있습니다. 수녀원 성당은 1687년부터 1692년 사이 새로 지었으며, 12세기 모습을 간직한 소성당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대식 건물입니다.
소성당들은 저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십자가 소성당’ 기둥에서는 1000년 전 수녀원의 고풍스러운 미를, 절벽 끝에 있는 ‘천사 소성당’에서는 천상의 아찔함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눈물의 소성당’에서는 성녀가 아버지를 위해 흘린 눈물의 흔적과 기도의 힘을 봅니다.
아달리히 공작은 경건한 신자인 척했지만, 실상은 모순덩어리로 잔혹한 인간이었습니다. 결국 딸의 기도로 구원받습니다. 악의 뿌리는 깊어서 스스로 뽑지 못합니다. 눈먼 이에게 빛을 비추고, 스스로 참회하지 못하는 죄인을 위해서는 언제나 다른 이의 기도가 절실하다는 것, 대림 시기 성녀의 기념일(12월 13일)을 맞이해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순례 팁>
※ 스트라스부르와 콜마르에서 자동차로 45분 소요.(A35) 아랫마을에서 이교도 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표지판이 잘 되어 있다. 도보로 1시간 소요.
※ 적절한 가격대의 수녀원 호텔과 레스토랑. 수녀원에서 500m 떨어진 곳에 기적의 샘.(도보 및 차량 이동) 눈물의 소성당과 천사 소성당의 모자이크, 수녀원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