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해체·학대·방임?. 부모가 할퀸 상처로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품어 보살펴온 푸른 눈의 사제가 있다. 프랑스 출신 허보록(Phillipe Blot, 파리외방전교회 한국부지부장, 65) 신부다.
1990년 한국에 온 그를 지칭하는 또 다른 별명은 ‘아들 부자’. 아동보호시설 그룹홈을 만들어 남자아이들과 함께한 세월도 올해로 35년이 됐다. 때론 형처럼, 때론 삼촌처럼, 또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돌보며 그들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왔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가 됐네요.”
세월이 흘러 그의 얼굴엔 주름이 깊어졌지만, 아이들을 향한 미소는 더욱 따뜻해졌다. 현재 경기 과천 성 베드로의 집과 군포 성 요한의 집·성 야고보의 집 등 세 곳의 그룹홈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성 베드로의 집을 찾았다.
다섯 아이의 보금자리
성 베드로의 집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자 ‘참 살기 좋은 마을’란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눈길을 끌었다. 비석이 아이들의 안부를 대신 전하고 있는 듯했다. 마을 입구에서 5분여를 걸어 주택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는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 여러 대가 가지런히 주차돼 있다.
드디어 당도한 성 베드로의 집. 영하에 이르는 바깥과는 달리, 집 안엔 온기가 돌았다. 따스한 색감의 가구와 벽지, 거실에 놓인 책상과 책들, 웃으며 함께 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한쪽 벽면을 차지한 정성스럽게 꾸민 트리와 장식은 주님 성탄을 기다리는 주말 낮 여느 가정집 풍경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 가운데 허보록 신부가 웃으며 서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허 신부가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크리스마스 때 뭐하고 싶어?” 낯선 이의 방문에 긴장해선지 허 신부의 물음에도 아이들은 별 대답이 없다. 그래도 허 신부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14일에 서울 하비에르 국제학교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축제에 갈 거야.” 허 신부의 나들이 소식에 아이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룹홈에 함께하게 되는 아이들 대다수는 부모에게 학대받은 자녀들이다. 그래서 처음엔 굳게 닫힌 아이들 마음의 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 그룹홈 내에서 서로 다투는 경우도 발생한다. 학교생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등교하지 않고 놀이터나 피시방 등을 전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때마다 허 신부는 파출소로, 피시방으로 아이들을 찾아 나선다.
“별별 사건 사고들에 아빠로서 챙기느라 힘든 때도 많았죠. 하지만 그때마다 미워하지 않고, 받아주고 또다시 기회를 주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시간이 흐르면 좋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게 보입니다. 천천히 가더라도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허 신부는 오늘도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손을 꼭 잡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되다
허 신부가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안동교구 하망동본당 보좌 신부로 사목하던 때였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성당 내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에서 남루한 옷차림을 한 아이들 5명을 목격했다. 너무도 배고파 보이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 보냈는데, 그날 밤 아이들이 다시 찾아와 재워주길 청한 것이다. 뜻밖이었다. 알고 보니 모두 하나같이 어려운 가정환경에 놓인 아이들이었다. 허 신부는 그날 바로 그들의 ‘아버지’가 됐다. 그가 처음 만든 그룹홈 ‘다섯 어린이집’의 시작이다.
허 신부는 이듬해인 1994년 옥산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사목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96년에는 안동에 성 프란치스코의 집과 성 글라라의 집을 설립해 아이들을 보듬었다.
허 신부는 1999년 수원교구로 옮겼다. 그리고 곧장 경기도 군포의 낡은 2층 집에 성 요한의 집 문을 열었다. “어휴, 그때는 정말 가난하게 살았어요. 세탁기가 없어 손으로 빨래하며 살았죠.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월급을 생활비에 보태기도 했는데, 25명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정말 살기 힘들었어요.”
허 신부는 어느 날 자리를 박차고 나가 공장에 갔다. 아이들을 위해 자신도 일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면접을 보고, 출근을 앞둔 어느 날 한 신자가 찾아왔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한 자매님이 찾아오셔서 제게 일하지 말고 아이들을 온전히 보살펴 달라고 하시면서 선뜻 후원을 해주셨어요. 그 덕에 공장에서 일하지 않을 수 있었네요.”(웃음) 그 후 낡은 2층 주택은 수원교구와 후원회원들과 가톨릭평화신문 사랑 나눔 캠페인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등을 통한 많은 이의 관심과 사랑으로 2007년 4층짜리 새 건물로 탈바꿈했다. 현재 2층은 성당, 3·4층은 아이들 방으로 쓰고 있다.
2009년에는 경기도 과천에 성 베드로의 집 문을 열었다. 당시 수원교구 과천본당에서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보살펴주길 요청했고, 허 신부와 연락이 닿아 본당 도움으로 그룹홈 문을 새로 연 것이다. 현재까지 그룹홈을 거쳐 간 아이들은 400명이 넘는다. “35년간 저와 함께한 아이들 숫자를 세어보니 이만큼이네요. 저는 400명 아이를 기른 아빠입니다! 하하.”
“주님께서 사제품 때 드린 기도 들어주셨어요”
[인터뷰] 그룹홈 ‘성 베드로의 집’ 담당 파리외방전교회 허보록 신부
“사제품을 받을 때 성당에 엎드려 주님께 기도했어요. 특히 외로운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달라고요. 주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어요.”(웃음)
허 신부는 성녀 마더 데레사(1910~1997년)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사제가 돼 성녀를 닮아 봉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986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99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서 사제품을 받고 그해 한국으로 파견돼 사목을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한 35년. 생각해보면 힘든 날도 많았다. 그룹홈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했을 때, 1997년 그룹홈에서 봉사하던 전과자에게 흉기로 상처를 입었을 때가 그랬다. 허 신부는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이란 일념으로 두렵고 힘들어도 다시 힘을 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립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가정을 꾸려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한발 한발 걸어왔다. 지금까지 사제와 수도자·평신도·후원자·봉사자들까지 감사한 이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허 신부가 가장 감사한 존재는 아이들이다.
“주님께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제게 보내주시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아이들과 같이 있으니 기쁘고 재미있습니다. 제가 오히려 힘을 얻죠.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그들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허 신부는 매일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신앙이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아직 신앙이 없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주님의 계획이잖아요. 특별히 이번 성탄을 맞아 주님께서 아이들이 지닌 깊은 상처를 힘껏 치유해주시길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