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지역을 여행하면 보덴호를 지나치게 됩니다.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 세 나라를 맞대고 있어 내륙의 바다라 불릴 만큼 큰 호수입니다. 온화한 기후 덕분에 인기 높은 휴양지지만, 콘스탄츠·브레겐츠 등 로마 제국 도시들은 이곳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라고 알려줍니다. 특히 호수 북서쪽 라이헤나우 섬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켈트족과 싸울 때 거점이었습니다. 여의도의 절반 정도 크기인데, 육지와 가까워 접근 및 방어에 유리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순례지는 이 섬에 있는 1300년 전통의 신앙이 깃든 라이헤나우 베네딕도회 수도원과 성당들입니다. 섬과 성당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이 성당들에는 주님 성혈 성유물을 비롯해 마르코 복음사가와 게오르크 성인 등의 성유물이 모셔져 있지요.
카롤루스 왕조 초기 성 피르미노가 세운 베네딕도회 수도원
섬의 역사는 724년 성 피르미노가 이곳에 처음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섬에 있는 세 성당에는 로마네스크 이전 양식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호수 건너편 서쪽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당이, 북쪽에는 수도원 성당인 성모 마리아와 성 마르코 대성당이, 동쪽에는 성 게오르그 성당이 보입니다. 중세 순례자들은 호수 건너편에 높이 솟은 종탑을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루터로 발걸음을 옮겼을 겁니다. 11세기 이곳 수도자 헤르만이 작곡한 ‘살베 레지나’를 읊조리면서 말이죠.
전설에 따르면, 알레만 귀족 진트라스가 성지 순례 중에 갈리아 출신 선교 주교인 피르미노를 만나 자기 땅으로 와서 복음을 전해주길 청했다고 합니다. 이에 724년 피르미노가 40명의 수도자와 함께 섬에 들어와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해 정착합니다. 주교가 처음 섬에 왔을 때는 뱀·두꺼비·독충으로 득실득실해 농사는커녕 살기조차 힘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교가 섬에 발을 처음 내디딘 곳에 샘이 솟아났고, 사흘 동안 독충들이 섬에서 빠져나갔다고 하죠.
물론 사료(史料)는 이런 신비로운 시작과는 좀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724년 피르미노 주교가 카롤루스 마르텔의 지원 아래 라이헤나우에 수도원을 세우고 초대 아빠스가 됩니다만, 3년 만에 쫓겨납니다. 보덴 호수 인근을 다스리던 공작이 이런 과정을 카롤루스 가문의 세력 팽창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후임 헤도 아빠스도 추방당하는 등 정치적 갈등으로 수도원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알프스 이북 수도원의 산실
라이헤나우 수도원의 전성기는 알레만 지역이 프랑크 왕국에 복속된 뒤부터입니다.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종교·문화 중심지로 부상합니다. 수도원 아빠스들은 왕국의 국정과 교회 문제에 자문과 교사로 활동하면서 경제적 번영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9세기 옛 목조 수도원 성당 대신 석조 성당을 세웠고, 섬 어귀에도 성 게오르그 성당을 세웁니다. 한때 25개의 성당과 소성당이 섬에 있었습니다.
수도자들은 독일 남부와 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 등지로 진출해 수도원들을 세웠을 뿐 아니라, 수도원 네트워크를 만들어 창립자와 은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자매결연도 주도합니다.
라이헤나우의 수도자들은 신학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세공술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뽐냈습니다. 장크트갈렌 수도원 도면은 물론 오토 대제의 왕관도 이들 작품이었죠. 특히 11세기 수도원에서 수많은 필사본이 제작됐는데, 아름다운 세밀화로 유명합니다. 이들 중 10개가 2003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1300년 신앙의 전통 이어가는 라이헤나우
수도원 역사가 라이헤나우 섬의 역사이기에 세 성당을 순례하면, 섬 전체를 훑어보게 됩니다. 지금은 둑길로 육지와 이어져 섬 안까지 지선 버스가 다닙니다. 섬 대부분은 농지로 온실 하우스가 많이 보이는데, 라이헤나우 토마토·양상추·오이는 지리적 표시 상품일 정도로 유명합니다. 알프스 푄과 온화한 기후 덕에 1년에 3번까지 재배한다고 합니다.
순례자는 세 개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에서 다양한 것을 받아갈 수 있습니다. 섬 어귀 들판에 있는 성 게오르그 성당 벽화에서 주님의 삶과 기적들을 보면 살아갈 힘을 얻을 겁니다. 섬 중앙 성모 마리아와 성 마르코 성당에서는 주님 성혈 성유물과 830년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성유물을 친견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섬 서쪽 끝 첼라 수도원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당에선 1300년 전통의 베네딕도회 저력을 확인합니다. 1803년 세속화로 마지막 수도자가 라이헤나우 섬을 떠난 지 250년이 지나, 2001년 가을 다시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당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해 1300년 전통을 잇고 있지요.
섬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성 마르코 복음사가 기념일(4/25)과 성혈 축제가 열리는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월요일은 섬 자체 공휴일입니다. 비잔티움 십자가를 뒤따라 섬을 도는 그들 모습에서 뿌리 깊은 신심을 봅니다. 그 전통 속에서 라이헤나우 섬은 여전히 살아있는 신앙의 장소로서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나 봅니다. 과거는 현재에 살아있습니다.
<순례 팁>
※ 콘스탄츠에서 차로 10분, 취리히에서 1시간 소요. 대중교통으로 콘스탄츠역에서 라이헤나우역까지 기차로 이동(S6) 후 버스로 환승(B204). 오버첼 크로이츠(성 게오르그 성당)·라이헤나우 무제움(라이헤나우 수도원)·라이헤나우 캠핑(첼라 수도원) 정류장에서 성당까지 도보 이동. 4~10월에는 콘스탄츠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이 다닌다.
※ 라이헤나우 수도원 성당 성혈 제대의 비잔티움 십자가와 마르코 소성당 제대의 성유물함,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바실리카의 에기노 소성당 벽화, 예수님의 기적들을 그린 성 게오르그 성당의 벽화와 지하 소성당.
※ 여름철 성모 마리아와 성 마르코 대성당 매월 첫째 주 10시 주일 미사에서 주님 성혈 유물 참배와 축복이 있다. 첼라 수도원 시간 전례 : 07:30, 12:15, 17:45(화~일) 에기노 소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