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라자로 마을(원장 유주성 신부)의 한센인들을 위해 50년간 나눔을 실천한 원불교 박청수(87) 교무(성직자)가 지난 11월 9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이웃 종교 지도자가 50년간 나눔을 실천했다는 사실과 휠체어를 탄 박 교무 시선에 맞춰 무릎 꿇고 인사를 전하는 이 주교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 길로 박 교무를 찾았다. 타 종교 재단에 50년간 지원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박 교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차’ 싶었다. 종교를 넘은 애덕 실천이라고만 하기엔 그의 그릇은 훨씬 컸다. 일찌감치 원불교에 귀의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찾아 전 세계를 누빈 박 교무에겐 종교는 물론 국경과 인종의 장벽도 없었다. 어른이 필요한 혼란한 시기, 한국의 마더 데레사, ‘마더 박’으로 불리는 박청수 교무를 만났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원불교 교무(敎務)의 가톨릭 사랑
“저에게 가장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을 쉼 없이 주는 사람들이 성 라자로 마을 한센인들입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게 걸림돌이 될까요?”
성 라자로 마을을 후원한 지 꼬박 50년이 된 박청수 교무. 그에게 한센인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기쁠 때 가장 먼저 달려가고, 힘들 때면 누구보다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주는 이들이다. 반세기 이어진 사랑의 인연이다.
“1987년 겨울 어느 날, 검정 치마저고리 옷을 새로 지어 입었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렸어요. 사제수품을 앞둔 신학생 어머니가 선물로 주신 질 좋은 모직으로 만든 옷이었습니다. 마치 어린 시절 새 옷을 입으면 자랑하고 싶듯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옷을 입고 간 곳이 성 라자로 마을이었습니다. 갑자기 방문한 저를 깜짝 놀라면서 반기는 한센인들과 잠시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그분들이야 제가 새 옷을 입고 온 것을 몰라봤지만, 그래도 새 옷 입은 설렘을 그분들 앞에서 풀었답니다.”
1975년 원불교에서 타 종교 방문 행사 때 우연히 성 라자로 마을을 방문한 박 교무는 그때 한센인을 처음 만나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당시 마을 원장 고 이경재 신부가 한센인들 집을 짓고 있었는데, 박 교무는 건축비를 보태기 위해 엿 장사까지 시작했다. 그렇게 15년간 엿을 팔아 한센인을 도왔다.
박 교무는 “어떤 한센인에게도 ‘언제 환자가 되었느냐?’ ‘병의 고통은 어떠하냐?’ 등을 절대 물어보지 않았다”며 “그저 만나고 있는 순간만이라도 그 질긴 외로움을 잊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진심 어린 선행과 호소력 있는 강연에 많은 원불교 교도(신자)들이 뜻을 함께했다. 누구 하나 “원불교에도 복지기관이 많은데 왜 천주교 재단을 돕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성 라자로 마을과 인연을 맺으면서 가톨릭 사제·수녀·평신도들과도 깊은 만남을 이어갔다. 그는 “원불교 교도보다 신부님, 수녀님과 더 친하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고 했다. 고 박완서(엘리사벳) 작가와는 영혼의 단짝처럼 지냈다. 고 김수환 추기경·노기남 대주교·최덕기 주교와 이용훈 주교 등 교회 지도자부터 수도자·평신도까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종교의 벽을 허물었고, 나아가 개신교 목사·불교 스님과도 깊은 관계를 이어갔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종교의 우월성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마더 데레사, ‘마더 박’
박 교무의 나눔은 종교뿐 아니라 국경과 인종도 넘어섰다. 그는 캄보디아·스리랑카·아프가니스탄·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세계 55개국에서 무지·빈곤·질병 퇴치에 힘썼다. 개도국에 옷을 보낼 때면 손수 헌 옷을 세탁하고 다림질까지 했다. 그가 보낸 옷은 15만 점이 넘는다. 북한에도 3번이나 다녀오며 쌀과 비료 등을 전달했다. 조선족·고려인 등 해외 한국 민족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뻗쳤고, 시각장애인·저소득층 어린이·북향민 등 국내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후원활동을 펼쳤다.
캄보디아에는 무료 구제병원을 설립해 지금까지 30여만 명이 혜택을 받았다. 북인도 히말라야 산턱의 라다크에도 종합병원을 세웠다. 학교도 국내외에 9개를 설립했다. 이외에도 필리핀 수재민·캄보디아와 아프가니스탄 지뢰피해자·몽골 화재 이재민·인도 불가촉천민·중남미 허리케인 피해자 등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도움을 손길을 보냈다.
그 공로로 한국적십자사 박애장 금장·캄보디아 왕실 훈장·국민훈장 목련장·인도 암베드카르 국제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가 받은 상금은 다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오롯이 돌아갔다. 2010년에는 국내외 97명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최종 후보자 10인에 들기도 했다. 가장 유력한 수상자로 거론됐지만, 당시 천안문 사태와 관련된 중국 인권 문제가 부상하면서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에게 돌아갔다.
올해 3월 한영기(수원교구) 신부와 김경섭 목사, 톤둡(Tondup) 인도 불교협회장 등 국내외 인사 44명이 박 교무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재추천했다. 수상은 불발됐지만, 이미 박 교무는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마더 데레사’ ‘마더 박’으로 불린다. 성 라자로 마을에서 인연을 맺은 한영기 신부는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사에서 “교무님의 박애 정신은 인종과 종교·국경을 한계 짓지 않고, 말 그대로 인도의 데레사 수녀와 같은 자비와 희생정신으로 고통과 빈곤 속에 있는 지구촌 곳곳에 도움의 손길을 베푸셨다”고 증언했다.
산골 소녀의 꿈
박 교무의 고향은 전북 남원시 수지면이다. “남원읍내도 아주 먼 도시라 여길 정도로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산골 소녀인 제게 원불교 교무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졌지요. 언제 보아도 인자해서 마치 선녀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머니도 그런 저에게 ‘원불교 교무가 돼 너른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위해 힘써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산골 소녀는 원불교 여성 성직자의 길을 주저 없이 선택했다. 그리고 그 신념을 평생 지키며 살았다. 박 교무의 삶과 말은 일치했기에 2007년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그가 설립한 강남교당 교도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겐 투자하지 않았다. 자동차도 없다. 지난해 낙상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기 전까진 직접 밥도 짓고 빨래도 해왔다.
거실 한쪽 벽에 붙은 원불교 가르침 ‘성불제중(成佛濟衆)·일원대도(一圓大道)·무아봉공(無我奉公)·순일무사(純一無私)’는 그가 평생 지켜온 신념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음 생, 그 다음 생에도 한반도에서 태어나 정녀의 몸으로 원불교 교무가 되어 사람들을 섬길 것입니다. 공(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당연히 저를 희생해야겠죠. 거짓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어른 박청수
교회 지도자부터 많은 이들은 박 교무를 이 시대 ‘어른’이라 부른다. 그는 “산골 소녀가 노벨평화상 후보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라며 “그저 각자 자리에서 남에게 부담 주지 않고, 크건 작건 자기 몫을 충실히 해낸다면 보다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덤덤하게 조언했다.
“세상이 혼탁할 때면 성직자나 수도자는 신선한 바람과 맑은 물이 되어 정화의 소임을 맡아 줄 것을 기대합니다. 소외 계층을 따뜻하게 돌봐주는 것도 당연히 종교의 몫이겠지요. 적어도 수도자의 인생이 빚지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저 스스로에게 타일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