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틈 없는 세상살이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청년이 많다. 언제 어디든 함께하시는 분임을 청년들도 모르지 않지만, 저물녘까지 이어지는 사회생활과 항시 오감을 곤두세우는 미디어 때문에 청년들은 내면에서부터 말을 걸어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갈피를 잃는다.
착한 목자 수녀회는 청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내면의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시간으로 2022년부터 서울·춘천에서 매달 하루 청년 기도모임 ‘잠시멈춤’(담당 박은희 효주 아녜스 수녀)을 열어왔다. 부산스러운 현실 속 ‘쉼’을 잃은 청년들에게, 하느님이란 어쩌면 휴식의 모습으로 다가가 위로하시는 분이 아닐까. 빛과 소리, 생각마저 비워낸 침묵에 잠겨 ‘쉼’이신 하느님과 비로소 대화를 나누는 기도모임 현장을 다녀왔다.
■ 소요 벗어나 찾은 고요
12월 26일 퇴근 시간 무렵, 연말 분위기의 서울 명동 번화가는 온통 빛과 소음으로 번져 있었다. 꺼질 줄 모르는 전광판 속에는 원하지 않아도 이목을 잡아끄는 연예인과 상품의 형상들이 즐비했다.
눈을 감지 않고서야 피할 길 없는 이미지의 폭격, 그 밑으로 들썩이는 상점가, 골목골목을 하나로 엮으며 일렁이는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에 행인들은 더한층 들떠 소음을 쏟아냈다. 흥분해 떠드는 사람들의 소음은 호객을 목적으로 틀어진 가요 소리, 최대치 음량으로 쿵쿵대는 광고 방송과 맞물려 마치 밀물처럼 온통 시내를 감치고 있었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음 그 한복판을 가로질러 10여 명 청년이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 영성센터로 발길을 향하고 있었다. 7시30분, 여느 때처럼 퇴근 후 스마트폰이나 OTT 영상을 보며 식사할 시간이지만 이렇듯 저녁 시간을 바친 건 그간 삶에서 절실했던 침묵을 찾아서다.
그런 청년들을 기다렸다는 듯 영성센터 강당에는 침묵의 환경이 준비돼 있었다. 한 사람씩 들어가 누울 크기의 A자 텐트(초막)들이 설치돼 있고, 그 앞에는 LED 기도 초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초막들 앞에는 소리 없이도 온기를 자아내는 모닥불이 꾸며져 있었다. 불꽃을 닮은 붉은 천, LED 줄 전구, 나무토막들이 어우러져 만든 불이었다.
청년들은 휴대전화를 반납하고 각자의 텐트로 들어가 앉아 침묵하며 준비 기도를 바쳤다. 곧 불이 꺼지고 고즈넉한 어둠이 뒤덮었다. 꼼지락거림도 큰 소리로 느껴지게 하는 고요함…. 그 속으로 다 같이 몸과 마음을 맡겼다.
삶에 지친 청년들 침묵 찾아 모여
고요함에 몸과 마음 맡기는 시간
하느님 통해 참된 휴식·해방 체험
■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시편 46,11)
“이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사정으로 애쓰고 있는 우리는 지금 이 시간 하느님께 모여왔습니다.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곳으로 온 너희는 좀 쉬어라.’”
미션 파트너 청년의 안내를 따라 30분간 ‘몸의 기도’가 시작됐다. 청년들은 초막 안에 편안하게 누웠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나를 찾고, 살펴보고, 감사함을 의식하는 몸과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숨 고르기부터 시작했다. 몸의 각 부분이 언급될 때마다 그동안 영혼과 함께 고생한 육신을 위해 머물러 봤다. 머리, 눈, 코, 입, 귀, 어깨, 가슴, 손, 허리, 다리와 발, 생식기…. 어느 기관이든 기억이 머무는 곳에 멈춰서 대화를 청했다.
나를 생각하게 하는 머리…, 나의 머리에 있는 계획들은 하느님의 계획과 일치하는 생각들일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보게 하는 눈…, 나의 눈으로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들리는 귀…, 이런 들림 속에 나를 아프게 했던 소리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흘려보내 볼까.
“지금까지의 내 삶의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아픔도…. 모든 순간을 묵묵히 함께해 온 나의 몸. 여러분은 이런 여러분의 몸과 얼마나 자주 소통을 하시나요.”
청년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아와 생각을 ‘잠시 멈추고’ 육신에 집중했다. 이렇듯 진정 멈춰 세우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기도모임이 시작된 것도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피정이 절실하다”는 청년들의 하소연에 수녀들이 귀 기울이면서부터였다. 경쟁적인 세상살이, 매순간을 둘러싼 미디어를 벗어나 쉬고 싶어하던 청년들은 “신앙생활조차 뭔가(봉사, 염경기도)를 해내야만 하는 과업처럼 다가와 진정한 휴식을 체험하지 못한다”고 말해왔다.
치유의 음악이 끝나자 종이 세 번 울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청년들에게 스크린 속 메시지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자기 자신을 비워낸 청년들 가슴에 파고든 건, 소리 나는 말과 복잡한 고찰보다도 묵직하게 아로새겨지는 침묵의 위로였다.
‘쉼의 시간을 통해 여러분은 어떤 것들을 느끼셨나요? 떨쳐내려고 해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고민, 걱정들로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나요? 괜찮습니다. 이 모든 순간에 주님은 이곳에,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기도모임을 마친 청년들은 끝으로 모닥불 주변에 소그룹으로 둘러앉아 그날의 묵상을 나눴다. 감각과 생각 양쪽으로 ‘나’를 멈추게 두지 않는 세상, 청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가 그러한 멈춤 속에서 당신을 만나러 오길 기다리고 계셨다는 걸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수녀회 미션 파트너로서 수녀들과 더불어 기도모임을 인도하는 정해미(인덕 마리아) 씨는 “애써 새로운 영적 탐구까지 시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그렇게 온전히 자기 자신을 비우고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잠시멈춤’만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전에는 힘들면 의지를 잃고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성격이었다”는 정 씨는 “어쩌면 그건 내가 뭔가를 해 보여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렇게 나를 비우는 게 습관이 되자 힘듦 속에서도 의미를 놓지 않는 강건함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느님 뜻을 알아듣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내가 나부터 비우면 그분은 어떻게든 나를 변화시킬 테니까요.”
1년째 매달 기도모임에 나오는 9년차 직장인 김세레나(세레나) 씨는 “내가 입은 상처를 못 보게 하는 것도 나였다는 것, 그런 나를 멈춰서 그걸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예전에 김 씨는 시련이 닥치면 더 아등바등 매달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야 할 이유는 물론 자신의 힘겨워하는 내면조차 잊었던 것이다. 김 씨는 “그때는 하루하루가 이유도 모르고 버거웠다면 지금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정표를 볼 줄 알게 됐다”며 웃었다.
담당 박은희 수녀는 “하느님을 만날 때조차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도모임에서 참된 휴식과 해방을 체험하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