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예부터 국수를 잔칫날 함께 나눠 먹으면서 기쁨을 나눴고, 상가에서 음복하며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추모하고 슬픔을 달랬다. 돌·생일·회갑 등 태어난 날과 혼례 등을 축하하는 잔칫상에, 또 제사상 제수로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음식이 바로 국수였다.
국수는 고려 시대 송나라에서 들어왔다. 스님들이 송나라를 왕래하면서 국수를 들여와 절간 음식으로 먹었고, 이후 상류사회 잔치와 제사 음식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밀을 수입해 밀가루가 흔하지만 20세기 초반만 해도 밀은 비싸고 귀했다. 국수가 의례 음식으로 생일과 잔칫날·제삿날 등 특별한 날에 먹을 수 있는 별식 대접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밀이 귀하던 조선 시대에는 주로 메밀과 녹두·녹말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이외에도 콩·칡가루·밤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면에 쇠고기나 꿩고기를 우려낸 육수나 여러 채수로 국수를 만들었다. 멸치 육수는 20세기 이후 들어 사용했고 밀국수는 해방 후 수입 밀가루가 많아지면서 일반화됐다고 한다.
이 참에 국수와 관련된 우리 풍속도 살펴보자. 조선 시대에는 아기가 출생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축하 손님에게 국수를 대접했다. 아이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돌잔치에는 흰밥과 미역국·나물·구이·백설기·수수경단·과일과 함께 반드시 국수를 돌상에 올려놓고, 국수장국으로 손님을 대접했다. 아울러 ‘돌잡이’로 쌀·돈·국수 등을 놓고 아이의 미래를 점쳤다. 그리고 61세 회갑을 맞은 이에게 국수장국을 차려주고, 축하객들에게도 잔치 국수를 대접했다고 한다.
지방과 집안에 따라 다르지만 제사상에 ‘면서병동’(麵西餠東)이라 하여 국수를 서쪽에, 떡을 동쪽에 놓는다. 제수로 올리는 국수를 ‘메국수’라 하는데, 국수를 놓을 때는 삶은 국수사리만 제기에 담고 그 위에 계란채·잣·깨소금 등을 고명으로 얹어놓는다. 음복 시에는 장국밥이나 비빔밥 등 제삿밥에 메국수를 고명처럼 얹어 먹기도 한다.
혼례식 후 국수를 먹는 사람들 촬영
우리는 보통 “국수 언제 먹여줄래?”란 말을 “결혼 언제 할 거냐?”란 뜻으로 쓰곤 한다. 이는 혼인 잔칫날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이 국수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국수에 장수와 백년해로, 추모의 뜻을 담아 면을 끊지 않고 먹었다.
국수는 계절에 따라 여름에 냉면, 겨울엔 온면으로 먹는다. 냉면은 차갑게 식힌 육수에 동치미·배추김치·나박김치 국물을 섞어 쓰거나 육수만 단독으로, 혹은 동치미나 김칫국물만 따로 쓴다. 면을 만 다음, 오이절임·배·편육·동치미 무 썬 것, 달걀 등을 얹어 낸다. 온면은 국수를 삶아 헹군 뒤 사리를 만들어 두었다가 미리 만들어놓은 장국에 ‘토렴’하여 데운 후 그릇에 담고 쇠고기볶음·편육·달걀지단 등 꾸미를 얹어 더운 장국을 부어 만든다. 비빔국수도 있다. 고기 고명과 각종 나물·김치를 비빔 재료로 사용한다. 오늘날 춘천 막국수와 함흥회냉면 등이 대표적 비빔국수다.
국수는 가공 방법에 따라 절면(切麵), 압착면(壓搾麵), 타면(打麵)으로 나뉜다. 절면은 밀가루나 메밀가루 등을 물에 반죽해 끈기가 있게 잘 치대어 밀판에 놓고 밀대로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어 만든 국수를 말한다. 압착면은 잘 치댄 반죽을 국수틀에 넣고 압력을 가해 뽑아낸 국수다. 타면은 반죽을 양손으로 밀판에 치고 당기기를 반복해 가늘게 뽑아낸 국수를 가리킨다.
산업화 이전까지 국수를 삶을 때는 ‘광주리’와 ‘석자’를 빼놓을 수 없었다. 농가에 흔했던 광주리는 삶은 국수사리를 담아놓기 제격인 용기였다. 또 바가지 모양의 석자는 삶은 국수사리를 건져내는데 제격인 도구였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사진 중에 국수와 관련한 사진이 4장 있다. 그중 3장은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것이고, 나머지 한 장은 촬영자를 알 수 없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21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성당을 방문했을 때 한 혼례식에 초청받았다. 그곳에서 신부 측의 높은 손님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각자 소반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장면을 촬영했다.<사진 1> 이 사진은 이미 혼례식 때 소개한 바 있다. 여인들이 받은 소반 위에는 그릇 2개가 놓여 있다. 아마도 그릇에는 국수와 양념간장이 담겨 있을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성당을 방문했을 때 또 한 번 혼례식에 참여한다. 이때 혼례식 후 국수를 먹는 남성들<사진 2>과 여성들<사진 3>을 촬영했다. “수탉이 울고 암탉들이 그 주위에 모여드는 통에 촬영이 중단되곤 했다. 외교인들은 색다른 체험에 즐거워했다. 폭염 속에서도 촬영에 여념이 없는 총아빠스와, 새 필름을 갈아 넣을 때까지 혼례 중간에 종종 기다려야 했던 신랑 신부가 고생이었다. 혼례 장소로 쓰인 성당 마당과 정원이 넓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 일정이 너무 빠듯한 탓에 애석하게도 총아빠스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바로 원산으로 떠났다.”(「분도통사」 297쪽)
소풍 가서 국수 먹는 덕원 소신학교 학생들
베버 총아빠스는 바쁜 일정에도 한국의 전통 혼례식을 촬영했다. 그는 혼례를 마친 후 남녀가 구분되어 잔칫상을 받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들은 노인과 장정·어른·아이 없이 멍석에서 따로 잔치 국숫상을 받았다. 제법 큰 놋쇠 그릇에 담겨 나온 국수를 누구 할 것 없이 국물 하나 남김없이 맛있게 들이키고 있다. 장정 한 명이 참기름병인지, 간장병인지 모를 빈 병을 들고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멍석은 성당에서 정말 긴요한 도구다. 볕 좋은 날에는 멍석 위에서 교리 공부도 하고 한글 수업도 한다. 또 찰고도 한다. 또 혼인성사와 같은 잔칫날이나 장례를 치를 때면 어엿한 식탁이 되기도 한다.
여인들은 남자들과 달리 툇마루에서 잔치 국수를 먹는다. 아이들을 돌보고 잔치 일을 도와야 하기에 남자들보다 여유가 없다. 한 아낙은 아예 선 채 국수를 먹고 있다. 이미 국수를 다 먹은 이들은 여유 있게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한 여인은 어린아이를 가누고 있다. 바로 곁에서 오른손에 젓가락을 쥐고도 이를 마다하고 국수사리를 손으로 집어 막 입에 넣으려는 여자아이가 천진하다.
국수와 관련한 또 하나의 사진은 촬영자와 연도·장소가 알려지지 않은 ‘국수 먹는 남학생들’ 이다.<사진 4> 모자 교표와 교복으로 보아 아마도 덕원 소신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가서 국수를 먹고 있는 장면인 듯하다. 덕원신학교는 1940년대에 한국 교회 중심 신학교였다. 원산은 물론 서울·평양·대구·전주·연길 등 전국 교구 신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소신학생들은 종교 수업뿐 아니라 성경과 라틴어를 배웠다. 또 여러 악기를 배우며 사제의 소양을 키웠다.
사진 속 학생들의 표정이 장난스럽다. 국수를 쉽게 먹기 위해 모자를 비틀거나 위로 올린 모습이 귀엽다. 모자챙이 구겨지고 실밥이 뜯어진 것으로 봐서 모두 엄청 개구진 듯하다. 국수 국물이 새까매질 만큼 간장을 그득 부었다. 한입 가득 국수를 채운 학생은 이제 막 시작한 듯하고, 옆의 친구는 벌써 그릇을 거의 다 비웠다. 또랑또랑한 눈빛이 호연지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