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룩한 가방을 멘 젊은 사제와 여성 신자가 반지하 주택 현관문 앞에 밝은 표정으로 서 있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산하 봉천3동선교본당 주임 강선훈 신부와 20년 차 봉사자 정윤희(스텔라, 54)씨다. 매주 목요일 오후 1시 30분은 선교본당 봉사자들이 정성껏 만든 반찬을 주변 어려운 이웃에게 배달하는 시간. 평소엔 돼지 불고기나 생선구이 등 입맛을 돋우는 반찬을 마련하지만, 이날은 연초인 만큼 떡국 재료를 준비했다.
이윽고 집안에서 대답 대신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강 신부와 정씨를 알아본 할아버지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활짝 번진다.
“아이고, 추운데 고생하시네. 이렇게 추운 날은 (반찬 배달) 빠져도 되지. 잘 먹을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울퉁불퉁 좁은 길을 익숙하게 걷는 두 사람을 따라 다음 배달 장소로 향했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연립주택부터 아파트까지, 서울 관악구 청림동 일대를 돌며 35가구에 떡을 전했다. 신자보다 비신자가 더 많았다. 오랜 시간 만나온 이들도 있고, 주민센터에서 추천받은 대상도 있다. 대부분 홀로 사는 노인이었고, 드물게 청년도 있었다.
한 할머니는 “내가 성당으로 가면 되는데 뭐하러 힘들게 왔느냐”며 애정 어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초인종이 울리고 3분 동안 ‘아이고’ ‘오메’ 소리와 함께 겨우 발걸음을 떼 현관문을 열자마자 한 말이다. 친자식을 배웅하듯 할머니는 아파트 복도에 선 채 멀어지는 강 신부와 정씨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좋은 일 많이 하셔”라는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마침내 배달을 마치고 봉천3동선교본당으로 기쁘게 돌아가는 두 사람 발걸음도 빈 가방처럼 가벼워 보였다.
가난한 이를 받드는 ‘하늘자리 공동체’
선교본당은 복음적 가난을 사는 공동체로, 빈민 사목을 위해 사제가 상주하는 속인적 사목구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근본 정신으로 이웃사랑 실천을 위해 지역 주민·신자들과 함께 고민하고 연대한다. 서울대교구에는 IMF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 삼양동을 시작으로 금호1가동·무악동·봉천3동·장위1동 등 5곳이 설립됐다.
봉천3동선교본당의 또 다른 이름은 ‘하늘자리 공동체’다. 봉천동(奉天洞) 뜻인 ‘하늘을 떠받드는 동네’에서 따왔다. 관악산 북쪽에 위치해 지세가 험하고 고도가 높은 데서 유래했단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봉천동은 오랫동안 달동네의 대명사로 통했다. 본동부터 11동까지 있었지만, 2008년 행정동 이름이 바뀌면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봉천3동도 ‘푸른 숲’을 의미하는 청림동이 됐다. 1999년 3층짜리 다세대 주택을 고쳐 설립한 봉천3동선교본당 문패에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선교본당 건물 반지하와 1층은 주방과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주방은 서울 빈민사목위원회 활동가들이 세운 생산협동조합 ‘하늘자리 김치’가 있던 곳이다. 수익금으로 실직자 재활을 지원하는 공동체였다. 창고에 쌓인 상태 좋은 헌 옷들은 현재 깔끔히 세탁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하늘자리 나눔터’에서 판매되고 있다. 수익금은 역시 어려운 이웃 생계비나 장학금·의료비로 쓰인다.
2층은 둘로 나눠 큰 공간은 동네 어르신을 위한 ‘할머니 쉼터’, 작은 공간은 주임 신부가 거주하는 사제관이다. 할머니 쉼터는 매주 화~금요일 봉사자들이 만든 밥도 제공한다. 마침 이날 오순도순 소파에 모여 앉아 있던 할머니들이 “성당이 아들딸보다 더 잘 챙겨줘. 여기서 자고 갈까 봐”라며 웃음꽃을 피웠다.
가난은 불행이 아니라 불편일 뿐
3층엔 봉사자들이 소중하게 아끼고 돌보는 아늑한 성전이 있다. 현재 활동 중인 봉사자는 모두 6명. 대부분 20년 안팎 경력을 지닌 베테랑들이다.
봉사자들은 서로 호칭을 ‘이모’라고 통일했다. 예전에 저소득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하늘자리 공부방’을 운영했을 때 정한 원칙이다. 조손·편부가정이 많았던 동네 특성상 여러 아이가 ‘엄마’라는 말에 위화감을 느껴서였다.
학교가 끝난 뒤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은 탈선하기 십상이다. 가정환경이 어려울수록 더 그렇다. 그래서 ‘이모들’은 공부방을 통해 아픔의 고리를 끊고 동네를 바꿔보기로 했다. 이사 오기 전 이문동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던 김애영(체칠리아, 66)씨를 비롯한 봉사자와 빈민사목 사제들이 의기투합했다.
우선 딴짓은 꿈도 못 꾸도록 밤 11시까지 아이들을 공부방에 붙들어 놓았다. 공부도 봐주고, 같이 웃고 떠들고, 열심히 음식도 해먹였다. 손맛 좋은 이모가 솜씨 발휘하는 날이면 25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절로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유독 사고뭉치인 아이는 주임 신부와 이모들이 교대로 등하교를 시켜주기도 했다. 이처럼 따뜻한 사랑과 관심 덕에 공부방 아이들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 이모들의 ‘자랑’이 됐다. 공부방은 2018년 문을 닫기 전까지 선교본당과 가까운 ‘하늘자리 평화의 집’ 2층에 자리했다. 동네 어르신들은 아직도 “우리 손주가 잘 클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며 손을 잡고 인사하곤 한다. 그만큼 선교본당이 시기마다 펼친 지역 사회를 향한 따뜻한 손길은 지금도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씨는 “예수님은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하시지 않았다”며 “종교를 초월해 지역 내 가난한 이라면 누구든 돌보고 더불어 사는 것이 빈민사목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가난은 불행이 아니고 좀 불편할 뿐이에요. 그리고 저희는 그 불편을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가난이 불행이 아님을 증명해냈습니다.”
복음을 사는 가족 봉천3동선교본당
떡을 배달했던 정윤희씨는 가난이 불행이 아닌 불편을 삶으로 증거한 인물이다. 그는 원래 봉천3동선교본당의 도움을 받던 입장이었다. 형편은 어려운데 남편과 사이도 안 좋은 상황에서 어린 자녀를 키우자니 막막할 때였다. 그런 정씨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곳이 바로 봉천3동선교본당 ‘하늘자리 김치’였다. 일하는 동안 아이는 하늘자리 평화의 집 1층에 있던 꽃망울 놀이방에 맡겼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때가 계기가 돼 봉천3동선교본당에서 세례를 받고, 봉사자가 돼 지금까지 즐겁게 활동하고 있네요. 복음 말씀처럼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살려고 노력하는 좋은 분들 모습을 존경스럽게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마찬가지로 봉천3동선교본당에서 세례받은 나종금(로즈마리, 58)씨도 “봉사자들이 서로 힘이 돼 준 덕에 지금까지 잘 굴러온 것 같다”고 전했다.
이모들에겐 늘 물심양면으로 든든한 ‘지원군’도 있었다. 현재 주임 강선훈 신부를 비롯해 그동안 함께해온 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사제들이다. 봉천3동선교본당의 산역사인 이모들 이야기를 경청하던 강 신부가 기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감동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