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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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여 년 신앙 역사 이어온 ‘주님 성의(聖衣) 성지’ 트리어 대성당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13. 독일 트리어 성 베드로 대성당·성모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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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어 성 베드로 대성당(좌)과 성모 성당(우). 너비 38m, 길이 95m로 그중 약 40m는 4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서쪽 정면과 후진을 포함해 35m는 11세기에 증축됐다. 중세 전성기에 옛 로마네스크 성당 대신 고딕 양식의 성모 성당과 회랑을 완공해 연결했다. 필자 제공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주교좌 도시 트리어

트리어는 모젤강이 흐르는 골짜기에 있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기원전 18년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트레베리아인이 살던 곳에 로마식 다리를 세운 날을 트리어의 시작으로 봅니다. 트리어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누던 시기 서방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전성기에는 약 8만 명이 거주하던,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요. 현재 주민이 11만 명이 조금 넘으니 그 규모를 가늠하실 겁니다. 아담한 시내에 도시 랜드마크인 ‘포르타 니그라’ 뿐 아니라 원형극장·온천탕·바실리카가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중으로 나란히 붙어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트리어 대성당과 초기 고딕 양식의 성모 성당은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트리어 대성당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주교좌 성당입니다. 고대 후기부터 중세를 거쳐 현재까지 모든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건축물일 뿐 아니라, 알프스 이북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태동해 현재까지 1700여 년 신앙 역사가 숨 쉬는 곳입니다.

우리의 시간 여행은 3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곳에는 이미 270년 무렵부터 에우카리우스 등 초대 주교가 이끄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처음 이들은 아마 성벽 안에 있는 가정교회에 모였을 텐데요. 311년 서로마 제국의 젊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베풀고 박해를 중지하면서 번듯한 주님의 집을 갖습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에 앞서 311년 ‘관용 칙령’으로 이미 그리스도교는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성 헬레나는 자기 궁을 신생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선뜻 내놓았고, 그 부지에 로마 다음으로 큰 주교좌 성당이 트리어에 들어서게 된 것이죠. 대성당 지하 유적에 당시 궁의 흔적이 있고, 화려한 천장화의 일부를 대성당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의 소성당의 ‘예수님의 성의’, 대성당 박물관의 ‘거룩한 못’과 성물함. 성의는 1996년·2012년엔 순례자들이 지나가면서 볼 수 있도록 현시했지만, 평소에는 성의 소성당 내 특수 장치가 있는 진열장에 보관하고 있어서 볼 수 없다. 성 헬레나가 찾아온 거룩한 못은 대성당 박물관에 있는데, 당시 예루살렘의 유다 시키라쿠스 주교 앞에서 빛의 기적으로 진위를 검증했다고 한다. 필자 제공
 
트리어 대성당 주제대(좌)와 돔슈타인(우). ‘생명의 나무’를 주제로 한 현재 주제대 공간이 사실상 대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으로 4세기 후반에 지어진 25m 높이의 사각형 성당의 중심이었다. 성당 밖에 놓인 ‘돔슈타인’은 당시 건물을 지탱하던 네 개 기둥 중 하나이다. 필자 제공

성 헬레나가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성의(聖衣)

성 헬레나와 트리어에 얽힌 여러 이야기는 이런 배경에서 생겼을 겁니다. 그중 예수님의 속옷이 중세의 화두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골고타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겉옷은 로마 군인들이 네 조각으로 나눠 가졌지만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라 한 명이 차지합니다. 그 튜닉(tunic)을 헬레나가 성지 순례 중 찾아 트리어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헬레나가 327/328년 무렵이나 328년에 성지로 여행한 것은 분명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하기 전이었으니, 동방에 새 황실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헬레나가 성지 순례 중 골고타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주교들의 보고들이 있습니다. 다만 성의(聖衣)에 대한 기록은 고대 문헌에는 없고, 11세기 말 트리어의 성 마티아스 수도원에서 제작된 트리어 연대기 「게스타 트레베로룸」에 처음 나옵니다. 12세기 중반 레겐스부르크에서 쓰인 「왕실 연대기」에는 헬레나가 다른 성유물과 성의를 트리어로 보낸 기록도 있습니다만, 사료라기보다 문학 작품에 가깝습니다.

성의가 역사 속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196년 5월 1일입니다. 요한 1세 대주교는 새로 지은 트리어 대성당을 처음 봉헌하면서 주제대 안에 성유물을 안치합니다. 그 뒤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트리어는 중세 독일어권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중요한 순례길에 있었고, 시내에 알프스 이북에 유일하게 성 마티아 사도의 유골이 모셔진 성 마티아 베네딕도회 수도원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튜닉이나 성유물의 진위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관심사겠지만, 중세 순례자에게는 거룩한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위), 트리어 성의를 소재로 한 11세기 문학 작품 「오렌델」(아래 왼쪽), 1844년의 트리어 순례 포스터(아래 오른쪽). 50일 동안 약 50만 명이 트리어로 순례했으며, 순례 중 18번의 치유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필자 제공
 
트리어 대성당 파이프 오르간. 5500개의 파이프가 제비 둥지처럼 벽에 매달려 성당 전체로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필자 제공

현대까지 이어지는 트리어 성의 순례

1512년 신성 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1세가 제국의회에 참석하러 트리어에 왔을 때 성의를 참례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시 대주교는 황제와 많은 주교 및 성직자들이 참석하는 가운데 제단을 열어 성의를 현시하는데, 이 모습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뒤로 지금 대성당 서쪽 후진에 로지아를 설치해 7년 주기로 시민들에게 현시했다고 합니다. 종교 개혁 이후 현시는 중단됐다가 1844년 트리어 순례 등 특별한 기간에 제대를 열어 현시한 후 같은 방법으로 다시 주제대에 넣어 봉했습니다.

지금 성의는 트리어 대성당 옛 제대 뒤편으로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새로 지은 성의 소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매년 130만 명이 대성당을 찾지만, 특별한 시기 외에는 소성당에 들어갈 수도, 성의를 보지도 못합니다. 19세기 복원 시도로 성의가 훼손되어 특수 장치가 있는 진열장에 모셔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97년부터 매년 열리는 트리어교구 축제 기간인 ‘성의의 날’에는 평소 닫혀 있는 성의 소성당을 개방해 순례자들이 참례할 수 있습니다. 축제 기간에는 성유물에 관심 있는 신자뿐 아니라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현재 교회의 과제를 두고 포럼도 열립니다. 순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험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죠. “내가 믿는다는 것, 그것은 엄청난 일입니다”라는 2025년 모토처럼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는 것, 믿고 순례를 떠난다는 것 자체가 큰 은총이 아닐까 합니다.

 

<순례 팁>

※ 룩셈부르크 공항(30분)이 제일 가깝고, 룩셈부르크에서 노선버스가 다닌다(117·118번, 30분 소요). 룩셈부르크·자르브뤼켄·코블렌츠에서 매시간 기차가 다닌다. 코블렌츠에서 코헴 거쳐 가는 드라이브 코스!

※ 올해 ‘성의의 날’ 기간 : 2025년 5월 1~11일. 마티아 사도의 성유물이 모셔진 성 마티아 베네딕도회 수도원 순례도 추천(83번 버스 18분 소요)

※ 대성당 미사 : 평일 7:00·9:00, 주일과 대축일 7:00·10:00·18:00(저녁기도) / 성 마티아 수도원 시간 전례 및 미사 : 평일 05:45·12:30·18:15·20:00, 주일 7:00· 10:00(미사)·12:00(미사)·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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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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