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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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라는 직업은 세상에 사랑을 되돌려주기 위한 좋은 도구죠”

[모두를 위한 경제를 부탁해] 1. 제주 ‘건강한 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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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건강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25년차 성길홍 약사가 손님에게 투약법을 설명하고 있다.

본지는 올해 새 연재 코너 ‘모두를 위한 경제를 부탁해’를 통해 경제활동으로 공동선과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기업들을 탐방한다. 한국 EoC위원회와 함께 주는 문화와 사랑의 문화를 접목하고, 사람과 생명을 중심으로 기업을 경영하면서 그 이윤으로 사회의 나눔 문화 확산에 기여하는 따뜻한 기업들을 소개한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하다 약학과 편입

“몸은 좀 좋아져수꽈? 혈압약이 늘어난 거 보니 혈압이 올라싱게마씸. 지난번보다 약이 늘어났수다예.”

제주국제공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건강한 약국’(제주시 서사로 155). 수더분한 인상에 흰 가운을 입은 성길홍(요셉, 57) 약사가 분주하다. 약국 건물에 심장내과와 소화기내과·산부인과·마취통증의학과가 있어 약국 출입문은 쉴 새 없이 여닫힌다. 유리문이 여닫힐 때마다 제주의 습한 바람도 함께 드나든다.

약국은 24평이지만 성 약사가 주로 머무는 공간은 2~3평 남짓한 조제실이다. 건강한 약국에는 성 약사를 포함한 약사 3명과 직원 4명이 함께 약을 조제하고 투약법을 설명한다. 종일 좁은 공간에서 일하려면 직원들과의 ‘팀플’(팀플레이)은 생명이다. 진상 손님이라도 와서 행패를 부리면 약국 분위기는 금방 싸해진다.

“어떤 할머니가 파스를 가져와 바꿔달라고 하시는데, 우리 약국에서 판 파스가 아닌 거예요. 아무리 설명해도 필이 꽂히면 변하지 않는 분들이 있죠. 결국엔 제 돈으로 드렸죠.”

성 약사는 “좁은 조제실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 분위기는 바로 싸해진다”며 “약국이라는 공간에서 서로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서강대 화학공학과 86학번으로 졸업한 성 약사는 제주 토박이다. 졸업 후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 원광대 약학과로 편입했다. 3명을 뽑는데 140명이 지원했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온 그는 2000년 근무약사로 일하다 2002년 제주교구청 근처에 첫 약국을 열었다. 약사 생활의 시작이었다.

“당시 ‘현대약국’으로 8~9년 운영하며 일을 너무 열심히 했어요. 한참 젊었고, 일에 대한 재미도 있었고요. 1년에 이틀만 쉬었을 정도로 바빴죠. 일에 파묻혀 죽을 거 같은 거예요. 고등학교 때부터 포콜라레 젠 활동을 해왔고, 약국을 운영하며 보름 동안 로마에 ‘기혼 포콜라리노’(기혼 성소) 양성 학교를 다녀와야 해 대신 일할 약사를 구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일에 대한 애착을 놓는 과정이었습니다.”
EoC 개념을 도입해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성길홍 약사는 “약사라는 직업은 세상에 사랑을 되돌려주기 위한 좋은 도구”라며 “사랑 안에 살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2013년 건강한 약국 시작하며 EoC에 관심

일에 대한 애착을 놓으면서 사회적 관심들이 생겨났다. 제주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주민들을 위해 20명이 넘는 약사들이 ‘라파엘약사회’로 뭉쳤다.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가 이주사목 담당 사제로 사목하던 시절, 그는 가톨릭의사회와 함께 제주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 봉사했다. 약국에 매여 있으면서도 홀로 점심시간에 노숙인들이 많이 모이는 제주시 탑동을 방문해 투약 봉사를 했다.

“노숙인들에게 처방이 필요없는 감기약과 진통제·파스·연고를 많이 나눠줬어요. 그런데 정해진 양의 약을 주는데, 약을 쟁여놓고 더 달라고 하더라고요. 혼란스러웠죠.”

그는 “‘내가 저 사람을 위해 갔는데, 더 달라고 하면 안 주는 게 맞을까?’ 고민했다”면서 “약사니까 약을 주는 일 자체에만 신경을 썼다”고 했다.

“노숙인에게 투약하러 갔을 때 일처럼 주고 와버리면 약이 얼마나 필요한지 못 느껴요. 하지만 그 사람 마음을 잘 읽으면 그걸 알게 되더라고요. 결론은 약을 더 주거나, 안 줄 수도 있는 거죠. 사랑은 움직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가 ‘모두를 위한 경제 모델’ EoC(Economy of Communion)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3년 건강한 약국을 시작하면서다. 본격적으로 약국에 EoC를 도입한 건 3년 전이다. ‘EoC’는 경영의 중심축을 사람과 생명에 둔다. 즉 경제활동이 공동선과 친교·나눔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해마다 달력 700부를 제작해 약국을 찾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와 차상위 계층 손님들에게 조건 없이 나눠준다. 달력을 주면 약국에 더 오겠지 하는 마음은 접고, 약국에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건넨다.

또 직원 복지로 5년·10년 근속한 직원에게 150만 원을 포상금으로 준다. 포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 약사는 하루에 자신의 통장에 5000원씩 적금을 넣는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직원 한 명당 휴가비 50만 원도 지급한다. 두 달에 한 번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도록 하고, 직원들 점심 식대 도 제약 없이 쓰게 한다. 직원들이 건강을 잃지 않도록 운동 비용으로 해마다 30만 원씩 지원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노숙인들에게 무료로 약을 나눠주는 성길홍 약사는 노숙인을 통해 약사로서의 소명을 다시 깨달았다.

신앙과 EoC가 있어 ‘육각형 인간’으로 변화

“성격 유형 ISTJ(현실주의자)는 신앙을 가질 때 냉철합니다. 감성적이지 않아요. 신앙에서도 만져지는 현실이 있어야 해요. 신앙이 두루뭉술하면 본인이 제일 불편하죠.”

만져지는 현실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다. 아버지와 남편이면서 늦깎이 약대 대학생으로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약국을 새롭게 차릴 때마다 하느님 은총을 체험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는 무상성·은총에서 오는 것”이라며 “‘나는 하늘에 통장이 있다, 언제든 꺼내쓰면 된다’고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말했다. 그 섭리를 느끼면 자유로움을 느끼고, 그것이 기업 운영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당신은 주인, 나는 머슴입니다’라고 하는 거죠. 경기가 안 좋은 건 당신이 알아서 할 것이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직원들이 한 끼에 많아야 1만 5000원을 쓰는데 한 달에 식대를 더 많이 내봤자, 한 달에 20~30만 원 나와요. 그걸로 부담을 주고 잔소리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에게 EoC 개념은 세상을 향해 관심을 갖고 열려 있는 것이다. 그가 해마다 후원하는 금액은 1000여만 원이다. 라파엘클리닉과 애덕의 집·가정폭력 쉼터 등에도 약을 보낸다. 선교사를 통해 파푸아뉴기니와 레바논에도 약을 후원했다.

성 약사는 “모든 게 불확실한 시절,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어야 한다”며 “사랑(을 위한 행동)이 정형화되어 버리면 그 순간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약사라는 직업은 세상에 사랑을 되돌려주기 위한 좋은 도구”라며 “사랑 안에 살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고도 덧붙였다.

매일 일찍 일어나 새벽 미사를 봉헌하고 출근하는 성 약사는 퇴근길에는 묵주기도를 바친다. 그는 여느 약국과 달리, 약국에 없는 약의 처방전을 들고 오는 손님을 위해 따로 약을 구해다 준다. 약국은 제주교구 주교들뿐 아니라 사제들도 많이 찾는다.

그는 우리나라의 섬을 돌면서 필요한 약을 처방해주는 ‘섬 약사’가 되는 게 꿈이다. 시각장애인들도 손쉽게 약을 복용할 수 있게 해결해주는 시각장애인 프로젝트도 고민하고 있다.

“신앙이 없고, 또 EoC를 몰랐다면 내 멋에 일만 하다가 죽었겠죠.(웃음) 신앙과 EoC가 있어서 젊은 친구들이 말하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육각형 인간’으로 옮겨가는 것 아닐까요?”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 EoC(Economy of Communion)는 나눔·무상성(無償性)·상호성을 구현하는 새로운 기업 경영방식으로 1991년에 시작한 국제 경제사회 운동이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들이 중심이 되어 가난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취지로 결성됐다. 1997년 유네스코 평화교육상 수상자이자 포콜라레 운동 창설자인 키아라 루빅(1920~2008)의 제창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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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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