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6. 시장과 장터
<사진 1> 배오개 시장, 1925년, 유리건판,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일본인 상점 이용하지 않고 재래시장 고수
시장은 단순히 가게만 죽 늘어서 있는 저잣거리가 아니다. 있는 자 없는 자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이 드나드는 대중의 열린 터이다. 또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선 지금도 반드시 들러야 하는 소통 공간이다.
장사꾼들의 말처럼 시장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값나가는 귀금속부터 모든 생필품, 각종 먹거리가 즐비하다. 호객꾼들이 저잣거리를 오가며 손님의 소매를 잡고 끌다시피 자기 가게로 데려간다. 놋그릇 장수들은 양잿물을 가득 먹인 볏짚으로 유기를 윤이 나도록 닦고 있다. 옷감 장수들은 온몸에 치렁치렁 붉고 푸른 천들을 두르고 요란한 춤을 추며 시장을 찾은 이들의 눈길을 끈다.
난전(亂廛)은 어떠한가! 약초꾼들이며 할매들이 각종 약초며 채소들을 좌판에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시장 한곳에는 국밥 끓이는 냄새, 전 굽는 연기가 자욱하고, 그 틈으로 술판을 벌인 장정들이 취기 어린 잡담으로 삶의 고단함을 풀고 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여행지 곳곳에서 장터를 만났다. “시골 사람들은 장 보러 갈 때 자기 땅에서 거둔 작물도 가지고 가서 판다. 도회 사람들도 시장에 의존한다. 지방 도시에는 상점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장 저 장 떠도는 장꾼들이 도시와 광범위한 인근 지역에서 생필품을 조달한다. 그래서 주 단위의 장날이 전국적으로 적절히 배분되는 것이다. 모든 장터에 닷새마다 장이 선다. (?) 당분간 일본인들은 이 시스템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곳곳에 상설 점포를 열었지만, 한국인들은 일본인 상점을 이용하지 않고 익숙한 재래시장만 고수하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식이라면 한국인들의 경제 활동은 침체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재래시장을 고집할 때, 일본인들은 밀집한 초가 마을 한복판에 신작로를 뚫고 일본 상점들이 도로변을 점유하여 인근 상권을 장악한다. 재래시장은 조만간 현재의 질서와 규모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순간부터 한국인들은 경제적으로 일본인에게 완전히 종속된다. (?) 이것이 이 나라 백성이 짊어진 압제의 업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17~218쪽)
<사진 2> 시장 풍경 1925, 1925년, 유리건판,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베버 총아빠스, 일제의 경제 잠식 목격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29일 수원 장터를 둘러보면서 단번에 우리 경제가 일본인에게 잠식되는 것을 꿰뚫어봤다. 그해 4월 공주 여행에서 그는 시내 길가 목 좋은 자리를 이미 일본인들이 차지해 가게를 열고 있는 것을 보고 무척 안타까워했다. 철로와 마차로 공산품을 대거 들여와 깔끔하게 가게에 진열해 놓은 일본인들과 달리 한국인 상인들이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한가득 지게 짐을 짊어지고 장터를 찾는 모습을 본 그는 영화롭던 조선의 옛 시대가 다시 올까 탄식했다.
베버 총아빠스가 목격했던 것처럼 1911년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야금야금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수탈해 갔다. 시장 상권도 그중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 이전 한양에는 3곳의 시장이 있었다. 종루 앞 ‘시전’과 숭례문(남대문) 밖 서소문 인근 칠패 시장, 흥인지문(동대문) 인근 배오개 시장이다. 시전은 궁궐 인근에 있었다. 이곳에서 비단·명주·무명·모시·종이·어물과 같이 왕실에 물자를 공급하는 상점을 ‘육의전’이라 했다. ‘칠패’는 포도청의 순라군이 감찰하는 여덟 개의 패(牌) 가운데 남대문 밖에서 연지까지 순라를 도는 칠패가 주둔하는 곳에서 유래했다. 배오개는 고개 입구에 여러 그루의 배나무가 있어 ‘배고개’라 부르다 ‘배오개’가 됐다고 한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인 ‘이현(梨縣)궁’도 배고개, 곧 배오개와 연관이 깊다. 칠패 시장은 어시장으로, 배오개 시장은 직물과 포목·농산물 등으로 유명했다. 칠패 시장은 도로가 생기면서 남대문 선혜청 자리로 옮겨 오늘날 남대문 시장이 됐고, 옛 칠패는 오늘날 중림 시장의 전신이다. 배오개 시장은 오늘날 광장 시장과 동대문 시장이 됐다. 베버 총아빠스의 우려대로 일본인들은 남대문 시장 상권을 장악했고, 우리 상인들은 청계천 변과 종로 일대로 밀려났다. 이에 박승직 등 종로 상인 26명이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배오개 시장에 민족 시장을 세웠다. 순수 조선인의 자본으로 새롭게 세워진 배오개 시장은 한양의 중앙 시장으로 발전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는 다수의 시장 사진이 있다. 이들 사진은 촬영자는 물론, 배오개 시장 사진을 제외하곤 촬영연도도 기록돼 있지 않다. 하지만 사진의 구도나 이미지가 주는 느낌이 베버 총아빠스의 사진과 흡사하다. 1925년에 배오개 시장을 촬영한 것으로 보아 다른 시장 사진도 이때 촬영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사진 3> 시장 풍경, 1925년?, 유리건판,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한양 배오개 시장 풍경 꼼꼼하게 촬영
‘배오개 시장’<사진 1>은 우리 민족이 투자해 상권을 키운 시장답게 상가가 모두 전통 초가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이도 사는 이도 모두 조선인이다. 자세히 들여다봐도 일본인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른편 상가에서 뭘 파는지 물건을 보기 위해 남녀랄 것 없이 몰려든다. 왼편 상가 앞에는 난전이 펼쳐져 있다. 여인들이 빈대떡과 같은 전을 팔고, 그 뒤로 가구점인지 포목점인지 알 수 없는 가게에서 두 소년이 높은 곳에 올라 호객하고 있다. 배오개 시장 사진은 일제 강점기 속에서도 소박하지만 우리 민족의 힘으로 우리 자본과 경제를 꾸려가려는 단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시장 풍경 1925’<사진 2>는 배오개 시장 풍경을 좀더 꼼꼼하게 촬영한 사진이다. 단발 소녀와 빡빡머리 소년이 이곳이 배오개 시장임을 알려준다. 이 둘은 ‘배오개 시장’ 사진에도 등장한다. 아마도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서양 선교사 모습이 신기해 따라다닌 듯하다. 아쉽지만 초점이 뒤편 놋그릇을 파는 남자들 무리에게 맞아 주 피사체인 여인들 모습이 흐려졌다. 아마도 좌판에서 떡을 팔고 있는 듯하다. 시장 사람들의 표정은 여유롭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모습이 정겹다.
‘시장 풍경’<사진 3> 역시 배오개 시장으로 추정된다. 양옆으로 줄지어 있는 상가 규모나 전신주와 배수 시설까지 갖춘 것으로 보아 시골 장터와 비교할 수 없다. 또 건장한 체격의 삿갓 쓴 이와 배수로 양옆에서 담배 피우는 이들이 짐꾼들로 보여 이 시장 상권이 활성화돼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4> 장터 사람들, 1925년?, 유리건판,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사진 5> 장터의 놋그릇 장수, 1925년?, 유리건판,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장터 사람들’<사진 4>과 ‘장터의 놋그릇 장수’<사진 5>는 앞의 시장 사진과 전혀 다른 풍경이다. ‘장터 사람들’의 주 피사체인 한복 입은 맨발 소녀는 애처롭다. 굶주림 때문에 장터의 음식 가판을 찾아온 듯하다. 그래도 고마운 게 두건을 쓰고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이 소녀에게 한 손 가득 먹거리를 건네줬다. 놋그릇 장수는 유기와 숟가락·요강을 내다 팔고 있다. 그 너머로 옹기장수도 보인다. 장터는 5일마다 찾아오는 해방구다. 아이나 엄마, 노인이나 장사꾼에게도 일상의 공간이지만 삶의 잔치를 펼치는 자리다. 그래서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생존 터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베풂의 자리이기도 하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