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도 선임기자의 톡(talk)터뷰] 사제 꿈꿨던 벨기에 입양아 출신 세계적 기타리스트 드니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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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3일 만에
부산 시청 앞에 버려져...벨기에 시골마을서 유일한 한국계로 성장
기타에 흠뻑 빠져들다
영 탤런트 콩쿠르 1위...유럽콘서트홀협회 ‘라이징 스타’ 선정돼 카네기홀서 데뷔 무대
친부모 찾으러
무작정 한국왔지만 끝끝내 못 찾고 아내와 딸 얻어
국경 초월한 음악활동
도쿄 기타 페스티벌 예술감독 맡아... 6월엔 유럽 무대 계획
‘평화’ 꿈꾸다
전쟁과 반목으로 고통받는 세상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음악 전하고 싶어
드니 성호(50, Denis Sungho Janssens)는 세계적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다. 부산에서 태어난 지 3일 만에 버려져 벨기에로 입양됐다. 14살 때 벨기에 영 탤런트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했고, 29살 때는 유럽 콘서트홀 협회의 ‘떠오르는 스타’로 선정됐다.
최근 한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그는 오는 4월 일본에서 열리는 도쿄 기타 페스티벌 예술감독으로, 그리고 6월에는 유럽 무대를 계획할 정도로 국경을 초월해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양부모는 그에게 드니(성 디오니시오)라는 세례명을 주고 주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끌었다. 청소년 시절 한때 사제를 꿈꿨고, 음악가가 된 후에는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는 그를 최근 서울 강남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제가 되려 했던 청소년기
드니 성호는 1975년 태어난 지 3일 만에 부산 중구 남포동 시청 앞에 버려졌다. 약 9개월 동안 보육원에 있다가 그해 11월 “우유를 좋아한다”는 짧은 설명 한 줄과 함께 벨기에에 입양됐다. ‘얀센스’라는 성을 얻은 그는 작은 시골동네에서 유일한 한국계 벨기에인이 됐다.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가족들이 저를 늘 지지해줬습니다. 다만 외모가 주변 사람들과 달랐는데, 그땐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침대 아래 바닥에서 잠을 잘 잤고, 양부모님이 먹지 못하는 매운 음식도 꽤 잘 먹는 아이였죠.”
가톨릭 신자였던 양부모는 프랑스와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디오니시오를 세례명으로 택했다. 드니 혹은 데니스로도 불리는 디오니시스 성인은 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체포돼 파리 근교에서 250년 무렵 참수형을 당했다. 순교한 곳이 바로 파리 순례지인 ‘몽마르트르’(순교자의 산)다. 어릴 때부터 사제 곁에서 복사를 했고, 성가대에도 섰다. 그래서 청소년기에는 자연스럽게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사제가 되고 싶어 공부도 했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16살 무렵 뭔가 의심이 가는 일이 있었는데, 제 친구 중 동성애자들이 좀 있었거든요. 그걸로 인해 교리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결국 사제가 아닌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됐죠. 하지만 제 인생에서 여전히 종교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청소년기가 되자 혼란이 일었다. “10대 때 왠지 모르게 화가 많이 났습니다. 정체성에 큰 혼란이 온 거죠. 양부모님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어요. 한때 좀비처럼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제 인생사 때문이었는지 불안감이 컸죠.”
그를 지탱해준 음악·기타·딸
드니 성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친숙했다. 체육교사였던 양아버지, 꽃집을 하는 양어머니는 여름마다 프랑스 휴양지를 찾았다. 거기서 피아노를 처음 만났다. “다섯 살 때 프랑스에서 우연히 본 피아니스트에게 한눈에 반했습니다. 이후 온종일 건반을 두드렸습니다. 피아니스트를 꿈꿨죠. 아주 어릴 때부터 바흐 칸타타(성악곡), 모차르트 레퀴엠(위령 미사곡)이 좋았습니다. 시끄러운 록(Rock) 음악은 좋아하지 않았고요.”
여덟 살 때 양부모는 기타를 건넸다. 기타에 흠뻑 빠져든 그는 14세 때 벨기에 영 탤런트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했고, 벨기에 몽스 왕립 음악원과 파리 고등사범 음악원, 벨기에 브뤼셀 왕립 음악원에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2005년에는 유럽콘서트홀협회 ‘라이징 스타’로 선정돼 뉴욕 카네기홀에서 데뷔 무대에 올랐다.
한국과 다시 인연을 맺은 건 친부모를 찾기 위해서였다. 2006년 “부모를 찾겠다”며 무작정 한국 땅을 밟았고, 고향 부산에도 갔다. 이상하게 몸이 기억했다. “처음 부산에 갔을 때 막연한 어떤 느낌이 떠올랐어요. 벨기에에 있을 때엔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살았는데, 바다를 보면 이상하게 늘 기분이 좋았어요. 양부모님이 생선을 거의 드시지 않았는데도 아기 때부터 생선 맛이 좋았어요. 부산에 와서 바다 냄새, 생선 냄새를 맡았는데 무척 익숙했죠. 몸이 아기 때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서 유전자(DNA) 대조작업까지 해봤지만, 결국 친부모를 찾는 데 실패했다. 대신 지금의 아내 이민희씨를 만났고, 딸 수아(5)를 얻었다. 평범한 아버지를 꿈꿨던 그에게 딸의 탄생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했다.
“갓 태어난 딸을 안았을 때 느꼈던 따스함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아버지가 되는 꿈을 이룬 거죠. 저는 음악가이고 자아가 강해서 아마 죽을 때까지 아이 같을 거예요. 관계성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딸과 친구 같은 아빠로 늘 남고 싶어요.”
이방인으로 사는 삶. 아웃사이더에서 진정한 음악가로
드니 성호는 유럽에서는 소수계 아시아인이었고, 한국에서는 우리말을 제대로 못하는 어중간한 존재였다. 그래서 양쪽 모두에서 ‘아웃사이더’(소수자)라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를 장점으로 활용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음악가로 거듭났다.
“어릴 적 피아노를 하고 싶었던 제가 지금은 기타를 하고 있습니다. 기타는 피아노보다 아웃사이더죠. 이런 정체성은 벨기에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아웃사이더가 음악가에게 더 좋은 면도 있어요. 사람들 많이 안 만나도 되고요. 하루 7시간 이상 연습합니다. 하루종일 할 때도 있고요. 아름다운 소리, 역동적인 소리를 내고 음반을 만들려면 연습을 많이, 자주 해야 해요.”
드니 성호는 4월 24일 일본 도쿄 키오이홀에서 열리는 도쿄 기타 페스티벌에 연주자가 아닌 ‘예술 감독’으로 데뷔한다. 6월에는 고향 유럽으로 돌아가 무대를 계획하고 있고, 8월에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세종 솔로이스츠·드니 성호가 참여하는 ‘키메라의 시대’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가 꿈꾸는 평화
그런 그에게도 최근 이민자가 급증한 유럽 사정은 우려스럽다. 자신이 어릴 적에 비해 사회통합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에 이슬람교를 믿는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늘었는데, 테러 등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왔지만, 지금이 훨씬 갈등의 소지가 많아요. 이민자가 늘면서 불어나 독어를 못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교육 수준도 낮아져 걱정이 크죠.”
그는 “이는 이주민 200만 명 시대에 접어든 한국도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민자를 받는 건 우리가 필요해서인데 ‘필요’에만 초점을 맞추지, 이들과 어떻게 융화하고 어떻게 교육할지는 고민하지 않고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인과의 융화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우리 스스로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드니 성호는 자신이 꿈꾸는 음악은 곧 ‘평화’라고 밝혔다. 그는 “제게 기타는 하느님과 연결하는 목소리”라며 “기타는 하느님과 관객, 저를 하나로 이어주는 수단”이라고도 했다.
“작곡하고 새로운 앨범을 만들려면 보통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걸립니다. 꼭 임신·출산 과정 같아요. 옛날엔 평화에 대한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열정 하나로 사람들과 만나곤 했죠. 그런데 요즘 전 세계가 전쟁과 반목으로 힘들잖아요. 그래서 음악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고 싶습니다. 정말 평화롭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