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바라본 새남터’, 유리건판, 1911년 3월,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 거룩한 순교 역사 현양
1911년 서울 용산에는 일본인 1만여 명이 거주했다. 대부분 군인이었고, 철도와 산업체 종사자들이 뒤를 이었다. 일제는 용산개발계획을 세워 이곳을 거점으로 조선의 산업 철도를 연결하려 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용산에 끌린 것은 그 무엇도 아니고 바로 이 땅의 거룩한 순교 역사 때문이었다.
용산과 한강 사이 형장에서 수많은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 그 대표적 성지가 새남터·삼성산·당고개·절두산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일본인들의 용산 개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1911년 한국 여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용산을 소개하기에 앞서 조선 천주교회사를 6쪽에 달할 만큼 깊이 있게 서술했다. 그러면서 그는 1911년 3월 7일 용산 기행문에서도 새남터 순교자들을 현양했다.
“우리는 강 건너편 언덕을 올랐다. 용산이 발아래였다. 시선은 회색 지붕들이 횅하니 건너뛰어 새남터 주위의 작은 집들 사이에 버려진 어느 누각에서 멈추었다. 고위 관리가 사형을 지휘하던 곳이다. 고문은 몇 주 동안 매일 계속되었다.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사지를 뒤틀고, 구멍 뚫린 판자로 발바닥을 때리고, 목봉으로 허벅지에 주리를 튼 후, 고위 관리 앞으로 끌고 왔다. 고문이 끝나면 다시 좁고 어두운 감옥에 처박혔다. 수십 년 동안 한 줄기 시원한 바람도 환한 빛도 든 적이 없는 곳이었다. 썩은 나무로 지은 감옥에서 휴식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채 부러지지도 못한 사지는 비틀리고 뒤엉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쇠잔하고 굶주리고 목마른 육신은 힘없이 쓰러지기 일쑤였다.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었다.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죽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형리들은 수형자의 가족들에게 돈을 뜯어낼 요량으로 틈나는 대로 매질하고 괴롭혔다. 참수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곧바로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이송되었다. (?) 집행관이 신호하면 망나니들이 백사장에 꿇어앉은 사형수에게 달려들어 녹슨 칼을 목덜미에 내리꽂았다. 목은 대여섯 번의 칼질을 받고서야 떨어졌다. 형리는 잘린 머리를 집행관에게 가져왔다. 집행관은 사형의 전 과정이 완결되었음을 제 눈으로 확인했다. 이 음산한 살육극을 집행하던 작은 누각은 형언하기 힘든 공포와 전율을 침묵으로 증언하며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3쪽)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 유리건판, 1911년 3월,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 내부’, 유리건판, 1911년 3월,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순교지 보이는 곳에 신학교 부지 마련
마치 새남터 형장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순교 과정을 묵상한 베버 총아빠스는 “순교자들은 수천 년 동안 폐쇄되어 있던 이 ‘죽은 백성’에게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는 삶과 영웅적인 힘이 충만하다는 것을 피로써 증거했다”고 찬양했다.<사진 1>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새남터 형장을 언덕 위에서 조망한 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을 찾아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경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대건 신부는 시복 대상자였다.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은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과 명동대성당에 이어 한국 천주교회에서 세 번째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조 교회 건축물이었다.<사진 2>
세 성당 모두 파리외방전교회 코스트 신부가 설계했다. 조선 시대 이곳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명승지인 함벽정(涵碧亭) 터였다. 이곳에서 새남터와 당고개 순교지가 보여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1886년 매입해 신학교를 세웠다.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은 1899년 착공해 1902년 완공, 봉헌했다.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은 지형을 자연스럽게 잘 이용한 건축물이다. 경사면을 그대로 살린 채 성당을 지어 언덕 아래에서는 3층, 언덕 위에서는 단층 건물로 보인다. 또 옆에서 보면 양지바른 언덕이 성당을 살짝 품고 있는 듯하다.
성당 모습은 명동대성당 옛 주교관(현 사도회관)과 흡사하다. 성당 안은 단아하고 고즈넉하다.<사진 3> 프랑스에서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돼 있었다. 신학교 성당이어선지 지성소 난간이 없고, 회중석은 좌우가 마주 보도록 가대 모양으로 돼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뿐 아니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부터 제8대 대목구장인 뮈텔 대주교까지 8명의 주교와 모방·샤스탕·오메트르·위앵·브르트니에르·도리·볼리외 신부의 유해가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에 임시 안치돼 있다가 용산 성직자 묘지와 명동대성당·절두산 순교성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등지에 모셔졌다.
이곳에서도 베버 총아빠스의 묵상은 계속됐다. “김대건 신부는 여기 누운 채 바로 옆 신학교에서 사제 성소를 준비하는 젊은 동포 신학생들에게 거룩한 열정과 영웅적 희생정신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는 신학생들에게 부디 순교자의 피를 잊지 말라고, 그대들의 혈관 속에도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4~125쪽)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장 기낭 신부와 신학생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한국인 사제 성소의 영적 못자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는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겸했다. 1942년 일제 탄압으로 신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한국인 사제 성소의 영적 못자리였다. 예수성심신학교는 1896년 한국인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신부를 시작으로 사제 105명을 배출했다. 이들 중 신학교 성당이 완공되기 전 사제품을 받은 10여 명을 제외하고 모든 신학생이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에서 기도와 성사를 통해 사제로 성장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교회 전통에 따라 신학교 교장 기낭 신부에게 자신의 방문 기념으로 오후 특별 휴강을 요청했다. 휴강은 받아들여졌고, 이를 이용해 베버 총아빠스는 교수 신부 3명과 신학교 전교생 41명을 촬영했다.<사진 4>
“신학교는 신부 3명이 맡고 있다. 이들이 라틴어 초급반부터 철학과 신학까지 전 과정을 담당하고 사제품까지 준다. 3년에 한 번씩만 신입생을 받기 때문에 부담이 조금은 덜하지만, 신부 셋이 감당하기에는 그래도 힘겨운 과업이다. (?) 선교 전 분야에 사제가 턱없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교수 신부가 충원되면 좋겠다. 재원이 넉넉하다면 건물을 더 크게 지어 입학 정원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성소와 인재가 차고 넘칠 것이다. 선교 사업이 급속히 진전될 것이며, 그 기반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디나 그렇듯이 여기도 노력과 희생뿐 아니라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다. (?) 행여 교수가 충원되지 않아 사정상 선교가 위기에 봉착하고 재원이 달리면 한국 가톨릭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이 존경스런 학교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지나 않을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순교자의 피로 축성된 한국 땅을 그런 운명에서 지켜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6쪽)
베버 총아빠스의 우려대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는 1942년 폐교된다. 그 빈자리는 성 베네딕도회가 운영하던 덕원신학교가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