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쥬 다리에서 바라본 솜강의 구도심. 중세 상인들과 수도자들이 오가던 길로, 지금은 조용한 운하와 운치 있는 골목길이 어우러져 있다. 뒤로 성 다블뤼 주교의 세례 성당인 생르 성당이 보인다. 출처=shutterstock
중세 유럽에서 왕권의 정당성은 세속적인 힘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부여받은 신성한 권위로 뒷받침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15세기부터 ‘가장 그리스도적인 왕(Les Rois Très-Chrétiens)’이란 칭호를 교황에게 부여받아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이를 자처했지요. 이런 프랑스 왕가의 신심이 가장 깊이 새겨진 도시 중 하나가 피카르디 지방의 수도인 아미앵입니다.
아미앵은 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120㎞ 떨어진 도시로 솜강을 끼고 있어서 로마 시대부터 ‘솜강의 다리(samarobriva)’라고 불리던 요충지였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군단을 거닐고 머물던 주둔지가 교역 도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성 마르티노가 로마 군인으로 복무 중 거리의 걸인에게 자기 망토의 절반을 잘라 준 곳도 이곳 성문 앞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미앵은 우리 한국 교회와 인연이 깊은 도시입니다.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 프랑스 왕실의 신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프랑스 왕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다지며, 전쟁과 통치의 길목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다. 좌측 북쪽 탑은 15세기 초, 우측 남쪽 탑은 14세기 후반에 완성됐으며, 현재 모습은 18세기 개축의 결과이다.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출처=shutterstock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 주제대와 본랑(왼쪽)과 내진의 애프스 소성당(오른쪽). 성당 바닥 240m의 미로는 구원을 향한 여정의 장애물과 힘든 길을 상징하는데, 중세 순례자들은 무릎을 꿇고 따라가기도 했다.
성 피르미노의 순교로 시작된 아미앵
아미앵역 앞 작은 광장은 파리와는 사뭇 다르게 차분합니다. 현대적 간판과 오래된 돌길이 공존한 길을 걷다 보면, 시야 너머로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이 서서히 들어옵니다. 아미앵 주교좌성당인 노트르담 대성당입니다.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은 1137년과 1206년 큰 화재가 있고 나서 고딕 양식으로 새로 지은 성당입니다. 1220년 착공해 50년 만에 주요 건물이 완공됐는데, 짧은 기간에 성당 꼴을 갖췄기에 전체적으로 조화를 잘 이루고 있습니다.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건 필리프 2세와 성왕 루이 9세의 후원이 컸습니다만, 대청(大靑)에서 뽑은 ‘아미앵 블루’ 염료와 직물 교역으로 생긴 아미앵 시민의 경제적 여력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중세 회화에서 보는 성모님의 푸른색이 바로 그 색인데, 16세기 후반까지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파란색 염료였지요.
대성당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다란 장미창과 세 개의 장엄한 출입문이 있는 웅장한 정면이 순례자들을 맞이합니다. 정면의 중앙 포털 은 ‘최후의 심판’, 오른쪽 포털은 ‘천상의 모후’가 주제입니다. 왼쪽 포털은 ‘생피르맹 포털’이라고 아미앵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문입니다. 팀파눔 부조에 생피르맹, 즉 아미앵의 수호성인인 순교자 성 피르미노 주교의 생애와 순교가 구현되어 있죠.
전승에 따르면, 피르미노는 스페인의 팜플로나 출신으로 툴루즈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 선교 주교로 파견되어 아장·클레르몽페랑·앙주 등에서 선교하며 수천 명을 개종시켰다고 합니다. 아미앵 초대 주교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303년 총독에게 끌려가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의 무덤에는 감미로운 향기가 주변을 감쌌으며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무덤 위로 아미앵 최초의 주교좌 성당이 들어섰는데, 현재 생트아슐 성당이지요. 7세기에 성 피르미노의 성유해를 지금 자리의 대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세례자 성 요한 성해를 모신 ‘생장뒤부 소성당’(왼쪽)과 성 다블뤼 주교의 성유물함이 모셔진 ‘생장밥티스트 소성당’(오른쪽). 생장뒤부 소성당은 1668년 피카르디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아미앵 주교 프랑수아 포르가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하는 새 소성당을 짓겠다고 맹세하고, 생피에르 소성당을 변형해 지었다.
대성당 건축의 원동력이 된 세례자 성 요한의 성해
대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밖에서 보이던 것보다 한층 더 압도적인 공간이 펼쳐집니다. 본랑 높이가 42.3m, 외부/내부길이 145/133.5m, 폭 70m, 내부 공간만 20만㎥에 달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두 배로 프랑스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합니다. 대지면적은 명동대성당의 5배에 달해 당시 아미앵 사람들이 모두 들어와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성당 북쪽 포털의 ‘생장뒤부’ 소성당에는 중세 프랑스 왕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세례자 성 요한의 성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1206년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피카르디의 성직자 발롱 드 사르통이 콘스탄티노플의 궁전 폐허에서 투명한 수정 반구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 두개골이 담겨 있었고 은판에는 그리스어로 요한 세례자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발롱은 은판을 팔아 귀국 여비로 쓰고, 성유물만 모시고 돌아와 아미앵의 리샤르 주교에게 선사합니다. 1206년 12월 17일 대성당에 성해를 모셨는데, 성 요한의 성유물은 이후 몇백 년간 대성당 건축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대성당 서쪽 정면의 생피르맹 포털(위)과 성 피르미노의 삶과 순교를 주제로 한 가대 펜스(아래). 후기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석회암을 매우 정교하게 조각해 사실적으로 만들었다. 반대편 가대 펜스는 세례자 성 요한의 일생이 묘사되어 있다.
아미앵에서 만난 순교성인 성 다블뤼 주교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단장한 주제대를 지나 주보랑으로 향하면, 가대 좌우 펜스로 세례자 성 요한과 성 피르미노의 생애를 생생하게 구현한 걸작들이 펼쳐집니다. 믿음을 증거했다는 이유만으로 투옥되고, 결국 참수형을 당한 성인의 모습 앞에서 한순간 숙연해집니다.
내진 한쪽 소성당에서 뜻밖의 성물함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제5대 조선대목구장으로 활동하다가 순교한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의 성물함입니다. 다블뤼 주교는 1818년 이곳 아미앵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키워나갔습니다. 1841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고 1843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입국한 후 1857년 제4대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주교품을 받고 내포 지방에서 활동합니다. 1866년 3월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면서 다블뤼 주교는 제5대 대목구장이 되지만, 그해 12월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됐다가 충청도 갈매못에서 순교하지요.
스무 곳이 넘는 소성당 중 생장밥티스트 소성당에 성 다블뤼 주교의 성물함이 모셔져 있는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자 성 요한, 로마의 박해 속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성 피르미노, 먼 이국 조선 땅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다가 순교한 성 다블뤼. 이들 성인이 남긴 신앙의 불씨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이곳을 순례하는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순례 팁>
※ 파리 북역에서 아미앵까지 기차로 1시간 30분(TER 30분 간격), 아미앵 중앙역에서 정면으로 800m 걸으면 대성당이 보인다.(도보 10분)
※ 세례자 성 요한의 성해는 일 년에 두 번(12/17~2/2, 6/24~9월 마지막 토) 일반에 공개된다. 성 다블뤼 주교의 자취가 서린 생르 성당! 대성당을 뒤로하고 큰길로 걸어 나와 북쪽으로 잠시 걸으면 운하 옆에 있다.(35 Rue St Leu, 80000 Amie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