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7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빌렘 신부, 1896년 12월 안중근 의사 가족과 운명적 첫 만남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20. 안중근 토마스 의사 가족과 빌렘 신부 그리고 청계동성당 <상>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빌렘 신부’,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프랑스인이지만 독일인으로 살아야 한 빌렘

니콜라 조제프 마리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한국명 홍석구, 1860~1938) 신부. 안중근(1879~1910) 토마스 의사를 기억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안 의사 순국 115주기를 기념해 3월 동안 2~3차례에 걸쳐 빌렘 신부와 안중근 가족 그리고 황해도 청계동성당에 관해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사진 아카이브를 소개한다.

빌렘 신부는 1860년 1월 24일 프랑스 모젤르(Moselle) 스피쉐렌(Spicheren)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 알자스 로렌 지방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그는 숙명적으로 프랑스 땅에서 프랑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독일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 발발한 보불전쟁(1870년 7월 19일~1871년 5월 10일)에서 프랑스가 져 고향 땅이 독일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후 강제로 독일어를 해야 했던 그는 ‘언어 장애인’처럼 외톨이로 살아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개인과 국가, 강대국과 약소국, 식민 지배를 받는 국민에 대한 고민을 다양하게 했다.

선교 사제가 되고 싶었던 그는 독일 메츠(Metz)교구 대신학교에 입학했고, 학장 티엘르 신부로부터 교황청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를 알게 된다. 그는 1881년 9월 파리외방전교회 입회를 지원했고, 1882년 부제품을 받고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이듬해 1883년 2월 17일 사제품을 받았다.

교황 파견 선교 사제로서 그의 첫 소임은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에서 사제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빌렘 신부는 1883년 5월부터 1888년 12월까지 5년 7개월 동안 페낭신학교 라틴어 교수로 재직했다. 이 시기 유학했던 조선대목구 신학생 17명 모두 그에게서 라틴어를 배웠다.



건강 잃은 빌렘 신부, 조선 선교사로 파견

어릴 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빌렘 신부는 열대성 기후로 일 년 내내 덥고 습한 페낭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요양원 신세를 질 만큼 건강을 잃은 그는 새 부임지를 희망했고, 그 결과 조선 선교사로 파견됐다.

1889년 2월 17일 자신의 사제수품 기념일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주교관에서 조선말을 배운 후 그해 7월 1일 초대 제물포본당 주임 신부로 부임했다. 그는 순교자의 땅 조선을 ‘새로운 나의 조국’이라 했다. 그때까지 그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다. 파리외방전교회원이었지만 늘 이방인이었다. 그는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가 갑작스레 선종하자 파리외방전교회 회칙에 따라 조선의 새 장상을 선출하기 위해 투표를 할 때도 말을 하고 싶지만 입을 열 수 없는 고독함을 체험했다.

그래서 그는 사목에 열중했다. 제물포본당 교우 가운데 상업 종사자가 많은 것을 파악하고 새 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교우들이 쉽게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미사를 늘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성체조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또 개신교가 교육사업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가톨릭교회도 교육에 투신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뮈텔 주교는 조선인이 교육을 받아 문명화되면 신앙을 멀리할 것이라 인식했다. 이러한 뮈텔 주교의 반지성주의는 훗날 안중근 의사와 빌렘 신부가 학교를 세우려 할 때 다시 한 번 거세게 표면화된다.

빌렘 신부는 이듬해인 1890년 11월 1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교장은 리우빌(Liouville) 신부였고, 신학생은 모두 20명이었다. 1892년 6월 페낭 신학교에 유학 중이던 조선대목구 신학생 모두가 귀국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편입했다. 이로써 그해 가을 새 학기부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는 조선대목구의 독자적 사제 양성 기관으로 운영됐고, 빌렘 신부는 그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1893년 4월부터 8월까지 제3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익혔다.
 
<사진 2> ‘안중근 토마스 의사’, 유리건판, 1909년?,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선교사로 살려면 프랑스 국적 취득 불가피

그가 4개월 만에 예수성심신학교 교장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프랑스 국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886년 조불수호조약 체결로 프랑스인은 조선 정부가 발행하는 호조를 지녀야만 전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빌렘 신부는 그때까지 독일 국민이었다. 프랑스 공사관은 법적으로 독일 국민인 빌렘 신부에게 프랑스 국민 자격을 부여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선교사로 자유롭게 행동하려면 프랑스 국적 취득이 불가피했다. 빌렘 신부는 교장직을 내려놓고 프랑스 국적 취득을 우선하기로 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빌렘 신부에게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려면 최소한 1년이 걸리며, 그간 프랑스 식민지인 코친차이나나 통칭에 머물러야 한다고 파리외방전교회에 통보했다. 하지만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식민지에 있기보다 아예 프랑스로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머물면서 국적이 나올 동안 조선 교회를 위한 선교 자금을 모금하라고 지시했다.

1894년 12월 14일 드디어 빌렘 신부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국적을 잃은 지 23년 만이었다. 그리고 조선을 떠난 지 근 2년 만인 1895년 9월 12일 프랑스에서 돌아왔다. 빌렘 신부는 그해 10월 16일부터 명실상부한 프랑스 국적 선교사로 알릭스(Alix) 신부를 도와 갓등이본당에서 사목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6년 4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사목 구역 분할이 결정돼 황해도 지역 초대 주임으로 발령받는다. 이어 그해 8월 1일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 마렴공소를 본당으로 설정해 부임한 뒤 초가 성당을 짓고, 소학교를 설립해 황해도 지역의 첫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5개월 뒤인 1896년 12월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베드로)이 빌렘 신부를 찾아와 입교와 함께 청계동공소 개설을 요청했다. 안중근 가족과 빌렘 신부의 운명적 만남은 여기서 시작됐다.
<사진 3> ‘안중근 토마스 의사’, 유리건판, 1909년?,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 1911년 5월 빌렘 신부 촬영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동을 방문해 빌렘 신부를 촬영했다.<사진 1> 수단을 입고 긴 수염을 기른 빌렘 신부는 손에 1878년 초판이 출간된 빌헬름 베버의 서사시 「Dreizehnlinden」(드라이젠린덴, 우리말로 ‘보리수 13그루’)을 들고 있다. 중세 초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과 프랑크 왕국의 작센족 이교도 간 정복과 선교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어쩌면 전쟁으로 국적을 빼앗겼고 또 선교사가 되어 이방인의 선교 최일선에 서 있던 빌렘 신부 자신을 투영하는 책일 것이다.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은 안중근 의사 증명사진 2장을 소장하고 있다.<사진 2·3> 1909년 여순감옥 수감 때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두 사진의 배경과 안중근 의사의 옷차림은 모두 같으나 <사진 2>에는 안 의사의 가슴에 수형자를 식별하기 위한 표식이 달려있고, 양손을 가운데로 모아 왼손 약지 첫마디가 잘린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진 3>의 안중근 의사 얼굴은 <사진 2>와는 좀 다른 모습이다. 양쪽 귀밑머리 모양과 눈썹, 수염의 길이와 숱이 차이 난다. 아마도 <사진 3>은 <사진 2>보다 앞서 촬영했든가, 좀더 젊은 시절 안중근 의사의 얼굴 사진을 합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리길재 베드로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03-0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3. 7

1베드 5장 12절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