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이 일어난 지 백 일이 넘었는데도 아직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내란주동자가 파면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있는 혼동과 파멸의 전조를 목격하며 불안과 분노로 하루하루 부대낀다.
평소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았던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와 평등 같은 삶의 진실과 가치가 이렇게 간절할 수가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한숨 쉬며 걱정만 하던 차에 다양한 직업과 세대의 여성 아홉 사람이 폭력과 광기의 시간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만들어야 하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연대의 목소리를 모은 책 「다시 만날 세계에서」를 봤다. ‘내란사태에 맞서고 사유하는 광장의 여성들’이 지닌 결기 있고 간절한 마음과 몸짓이 잔혹한 시대의 치유이자 희망으로 뚜렷하게 다가왔다.
계엄을 한국사 교과서에서만 봤다는 유선혜 시인은 그날을 ‘유독한 가스냄새에 잠들 수 없던 밤’이라고 썼다. 그 ‘밤’을 두고 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시인으로서 ‘그날의 감정을 잊지 않고 기록하는 것’이며 ‘그날의 충격과 분노를 붙잡고 있는 일’이라고 썼다. 그리고 만약 “시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가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매일 광장에 모이는 이들이나 어디에 있든 이 마음을 함께하려는 이들은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며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다.
내란 세력은 권력을 장악해 민주사회의 시민을 노예로 만들고 공동체를 붕괴시키려는 타락한 정신을 지닌 이들이다. 그런데도 계엄을 옹호하며 그것이 무슨 대수냐며 머리를 쳐드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선조들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우상 숭배를 하며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던 날들을 상기시키며 그들이 ‘악을 탐냈다’(1코린 10,6 참조)라고 썼다. 악을 탐냈다는 것은 자기만족 말고는 어떤 것도 달리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사로운 이익과 편의에 따라 자신들의 ‘하느님’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람을 죽여서라도 얻어야 하는 권력이 바로 악이다. 이 자기도취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이들이 예언자들이다.
예언자들이 마주한 체제는 왕정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였다. 어떤 형태의 다른 사회적 대안도 허용하지 않고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한 사이비 정치 이념이다. 이 전체주의의 상징인 솔로몬 왕은 성전에 황금 덩어리를 전시해 경제적 성과를 과시했다. 성전을 운영한 제사장들은 정결례를 만들어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는지를 결정했다. 강력한 군사력은 안보와 안전이 아니라 과시와 위협 용도였다. 이 역사가 400년을 지속했다.
예언자들은 아무 배경이나 권위도 없이 어디서나 나타나 배제와 착취 시스템을 흔들고 하느님의 공간을 넓혀 나갔다. ‘예언자’라는 말 자체가 하느님의 현실성을 암시한다. 예언자들이 깊게 믿었던 것은 하느님께서는 살아 숨 쉬는 인격이자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행위자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끝을 내기도 하고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언자들은 이 끝과 시작, 지금 있는 방식과는 다른 세상을 확신했다. 하느님을 자기 것으로 박제해 놓은 사람들에겐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이들에게 ‘광장’의 예언자란 위험하고 전복적이며 불쾌할 뿐이다.
혼동의 시간 속에서도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이들은 용기와 자유,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려는 감각을 벼려 나가고 있다. 사순 시기는 하느님 복음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그 ‘다른 방식’에 대해 결단하는 시간이다. 내란의 배경이 된 전체주의의 망령을 식별하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끄는 모순들을 드러내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다른 세상’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시편 63), 우리는 무엇이 더 나은지 이미 알고 있다.
박상훈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