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21. 프랑스 파리 ‘기적의 메달 성모 소성당’
두 번째 발현 모습의 성모상과 기적의 메달. 열두 개의 별은 성모님이 열두 사도 위에 세워진 교회의 어머니임을 의미하고, 시관이 씌워진 심장과 칼에 찔린 심장은 각각 예수 성심과 성모 칠고를 나타낸다. 기적의 패 뒷면의 십자가는 예수님, 알파벳 M자는 성모님을 상징한다.
파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수녀원. 1633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 루이즈 드 마리약이 설립한 사랑의 딸회 모원으로 1815년에 파리시로부터 기증받았다. 사랑의 딸회는 병자·고아·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교육·의료·사회복지 활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도심 한복판의 성모발현 성지
낯선 도시에서 만남은 매번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특히 파리라는 대도시는 그 자체로 특별합니다. 길을 가다가 발길을 멈추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장소를 쉽게 마주칠 수도 있는데, 그중에는 성모발현 성지도 있습니다, ‘기적의 메달 성모 소성당’이라 불리는 생뱅상드폴 수녀원, 즉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의 수녀원 성당이지요.
수녀원은 센강 우안 파리 7구의 봉마르쉐 백화점 본관과 별관 사잇길에 있습니다. 1852년에 생긴 파리에서 가장 오래되고 혁신적인 백화점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맵시꾼의 핫플레이스 옆에 성지가 있는 겁니다. 사잇길인 ‘뤼뒤박’은 이름처럼 옛날 센강을 건너는 ‘나루터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1685년 퐁루아얄 다리가 완공되면서 그 의미는 퇴색했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이 됐지요.
기적의 메달 성모 소성당 안뜰. 현재(왼쪽)와 19세기 초 모습이다. 당시 젊은 수녀들의 양성과 봉사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심지였다. 통로 끝이 소성당 입구이고, 오른편 수부는 성물방으로 바뀌었다.
교회와 신앙의 위기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초록색 수녀원 정문을 지나 좁고 기다란 통로에 들어서면, 한층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듭니다. 수녀회 두 창립자 사이로 벽면의 봉헌판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성모님께 표현한 감사의 상징입니다. 소성당까지 이어진 벽의 부조에 1830년 이곳에서 수련기를 보내던 성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일어난 은총의 사건들이 그림책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1830년 7월 18일 밤이었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가타리나 수녀는 하얀 옷을 입은 어린이의 인도로 소성당에 가서 성모님을 만납니다. 자정이 되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라고 밝히시고는 프랑스에 닥칠 어려움과 시련에 눈물 흘리시며 그녀에게 중요한 사명을 맡길 거라고 말씀하셨죠. 이후 성모님은 두 번 더 발현하십니다.
근데 왜 성모님은 200년 이상 발현이 없다가 파리 도심 한가운데에 나타나셨을까요? 19세기 초 프랑스는 대혁명의 여진으로 혼돈의 도가니였습니다. 특히 가톨릭 내부는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성직자 기본법(1790)을 제정해 성직자에게 교황청을 거부하고 국가에만 충성을 선서하도록 강요합니다. 이를 선서한 성직자와 거부한 비선서 성직자로 교회는 갈라졌고, 비선서 성직자는 미사 등 전례 집전이 금지되고 박해받았으며, 이런 갈등은 내전과 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1801년 나폴레옹과 비오 7세 교황의 ‘정교조약’으로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됐지만, 한 번 싹튼 세속주의는 사회 곳곳에 무성히 자라나 신성 모독이 일상사가 됐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고, 그 뒤로 세계 곳곳에서 발현하셔서 위로와 희망을 주십니다.
기적의 메달 성모 소성당. 성모님의 발현 이후 급속도로 늘어나는 순례자들을 위해 19세기 성당 건축 양식을 반영하면서도 소박한 수도회 전통을 살리도록 내부를 단아하게 여러 차례 개축했다. 첫 번째 발현 장면을 그린 정면 벽화는 1930년대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면서 새롭게 그렸다.
성모님의 선물 ‘기적의 메달’
소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크고 밝은 푸른빛 공간에 놀랍니다. 둥근 천장 아래 양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따사로움을 느낍니다. 첫 번째 발현을 그린 벽화, 두 번째 발현을 구현한 제대와 보조 제대는 성모님 발현을 압축 정리한 한편의 입체화 같습니다.
첫 발현으로부터 4개월 뒤인 11월 27일 저녁기도 무렵, 성모님은 보조 제대 위의 모습처럼 커다란 지구 위에 똬리 튼 뱀을 밟고, 두 손에 십자가가 있는 작은 황금색 지구본을 들고 나타나셨습니다. 잠시 후 지구본이 사라지고 주제대 중앙의 모습처럼 두 팔을 벌린 성모님 손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지구를 감쌌습니다.
우리가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서 모시던 성모상의 모습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어 성모님은 타원형의 ‘기적의 메달’ 디자인을 차례로 보여주시며 이 메달을 만들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제대 위 아치에 라틴어로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는 기도문을 그때 황금빛 문장으로 알려주신 것이죠.
12월 초 성모님은 세 번째로 발현하셔서 기도문과 기적의 메달 중요성과 보급을 강조하셨고, 신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메달을 착용하면 질병의 치유, 회개의 기적, 영적 보호가 이뤄질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성 가타리나 라부레 유해. 1933년 시복식을 앞두고 유해를 소성당으로 옮기기 위해 그녀의 무덤을 열었을 때, 놀랍게도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고 미라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자기 소임에 충실했던 침묵의 성녀
성모님의 발현은 가타리나 수녀의 고해 사제를 통해 교회에 알려졌습니다. 1832년 파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기적의 메달 2000개가 처음 제작 배포된 뒤로 신자들이 치유와 회심의 기적을 체험했다는 증언이 쏟아졌습니다.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은 성모님의 무염시태 교리를 공식 선포하면서 기적의 메달은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가타리나 수녀는 1835년 첫 서원 후 파리 외곽 병원에서 40년간 노인과 병자를 보살피며 살다가 70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깁니다. 장례식 당시 어렸을 때부터 발을 절뚝거리던 어느 가난한 한 여성의 12살 아이가 일어서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1947년 비오 12세 교황은 시성식에서 성인을 ‘자기 소임에 충실했던 침묵의 성녀’라고 칭송했습니다.
성인은 자신은 “그저 도구일 뿐”이라며 자신이 19세기 위대한 사건의 당사자라는 사실을 끝까지 숨겼습니다. 기적의 메달이 삶에 지친 한국까지 전해져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건 기도하며 묵묵히 자기 소명을 다한 성인의 공덕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신앙을 실천하는 삶이 얼마나 큰 기적을 낳을 수 있는지 여실히 느낍니다.
<순례 팁>
※ 지하철 10·12호선 ‘Sevres–Babylone’역이 제일 가깝다. 생뱅상드폴 수녀원은 봉마르쉐 백화점 본관과 별관 사잇길인 뤼뒤박 140번지에 있다. 140 rue du Bac 75340 PARIS. 파리 10구의 생뱅상드폴 성당과 혼동하지 말 것.
※ 성물방에 한국어로 된 기적의 메달과 안내 책자가 있다/(9:00~13:00, 14:30~18:30)
※ 소성당 미사 : 주일과 대축일 8:00· 10:00·11:30, 평일 8:00·10:30·12:30 / 고해성사 9:00~13:00·15:00~18:30 (평일), 저녁기도 18:50. 전대사는 개인 순례(1년 한 번)· 단체 순례·성모 마리아 대축일과 11/27·11/28 순례를 통해 영구적으로 부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