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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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 짊어졌지만 얼굴엔 천진무구한 웃음과 배려 묻어나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25. 짐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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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똥장군을 지고 가는 농부’, 유리건판, 1911년 2월, 서울 서대문 일대,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께서 수난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새 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세우기에 앞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3,14-15)

예수님께서는 또 모든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냐는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하신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의 새 계명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풀이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요한 사도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음 문장으로 요약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풍구를 지고 가는 농부’, 유리건판, 1911년 4월, 공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참된 회개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내어 맡김’

계명은 ‘하느님의 명령’이고 ‘신앙인의 의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 있었다.(레위 19,18)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랑을 보편 인류애로 이해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와 가까운 사람끼리 사랑해야 함을 명하는 계명으로 해석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한 이웃 사랑과 확연히 다르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3-45)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은 이전에 선언된 적도 없고, 윤리적으로 인식되지도 않았고, 일반적 관념도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로소 이를 당신의 새로운 계명이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여기서 놓쳐선 안 되는 것이 있다.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숨을 불어넣으시어 창조한 인간 모두는 하느님의 생생한 모습이다. 하느님 모상인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강생하신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은 하느님 모습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곧 하느님을 닮기 위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번 호에는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짐진 자’에 대해 묵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고, 죄의 보속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주님의 짐은 우리의 죄다. 죄는 그리스도를 죽게 하고 자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생명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참그리스도인이라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가장 확실한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인간은 우리 죄로 찔리신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회개하게 된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내어 맡김’이다.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셨다.(마태 11,28-30)

또 바오로 사도는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가르쳤다.(갈라 6,2)

주님 말씀대로 자신의 멍에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생활화하는 것이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머리에 짐을 인 여인들’, 유리건판,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물지게를 진 남성’, 유리건판,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힘겨운 제 십자가 졌지만 미소 잃지 않아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2월 23일 서울 서대문 인근에서 ‘똥장군을 지고 가는 농부’를 촬영했다.<사진 1> 서대문은 지금의 정동 신문로 언덕에 있었으나 1915년 일제의 경성도시개발계획에 따른 전차 복선화 사업으로 강제 철거됐다. ‘장군’은 똥이나 오줌·물·술·간장 등 액체를 담아 옮길 때 사용하는 그릇을 말한다. 똥을 담으면 ‘똥장군’ 오줌을 담으면 ‘오줌장군’이라 불렀다. 장군은 주로 지게로 져서 운반한 후 농지에 거름을 주는 용도로 쓰였다. 똥은 주로 논밭의 밑거름으로, 오줌은 덧거름으로 사용됐다. “시골 길은 너무 좁아서, 땔감을 잔뜩 싣고 성내로 가는 황소가 지게에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가는 농부를 비켜 가지 못한다. 시선이 멈추는 고갯마루에는 성벽이 푸른 하늘의 짙은 가장자리에 테를 두르고 푸른 하늘과 반짝이는 모래를 선연히 갈라놓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89쪽)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4월 공주로 가는 공산성 들머리에서 ‘풍구를 지고 가는 농부’를 촬영했다.<사진 2> 풍구는 바람을 이용해 곡물에 섞인 쭉정이·겨 등을 선별하는 농기구로 1900년대 이후 일본에서 도입됐다. 주로 송판과 합판으로 만들어졌고 크기만 해도 1m가 넘고, 혼자 지기엔 여간 무겁지 않다. “길은 낮게 물결치는 구릉 사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 마주 오는 한국인은 지게에 가구를 잔뜩 짊어졌는데 폭이 넓게 길을 독차지했다. 그는 경사면에 살짝 비켜서서 우리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12~313쪽)

베버 총아빠스는 또 ‘머리에 짐을 인 여인들’<사진 3>과 ‘물지게를 진 남성’<사진 4>을 촬영했다. 머리에 짐을 인 여인들은 아마도 밭일하는 농부들의 새참을 이고 가는 듯하다. 비록 무거운 광주리와 동이를 머리에 이었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고 발걸음도 가볍다. ‘물지게를 진 남성’ 또한 어깨가 내려앉을 만큼 무거운 물동이를 졌지만, 손주처럼 보이는 아이를 쳐다보는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하다.

베버의 ‘짐진 자’들 사진에는 힘듦·지침 등 부정적인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진무구한 좋은 웃음과 배려·사랑이 묻어난다. 웃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이와 모든 것에 호감을 품고 있을 때 가능하다. 각자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서로의 짐을 나눠지는 ‘겸손한 봉사’가 아닐까!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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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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