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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선종] ‘기쁘고 떳떳하게’…한국교회에 남긴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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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담백하고 열린 마음. 생전 두봉 주교가 강조했던 사제로서의 모습이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 땅에서 선교하며 사회적 약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정의를 외쳤다. 항상 소탈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주님 사랑을 전한 그는 신앙인들은 물론 국민 전체에게 진한 감동을 주며 존경받아 온 한국교회의 큰 어른이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하나로 70여 년 사목활동에 임해온 그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 ‘기쁘고 떳떳하게’

 

 

두봉 주교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교구의 가톨릭 가정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0년 21세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고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1953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와 한국의 인연은 한국교회 복음화 사명을 받고 1954년 12월 한국 땅을 밟으면서부터다. 처음 사목활동을 시작한 곳은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본당이었다. 보좌신부로 힘차게 첫발을 내딘 그에게 당시 주임이었던 고(故) 오기선(요셉) 신부가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그의 프랑스 이름이던 ‘뒤퐁’을 음차한 두봉(杜峰)이었다. ‘두견새’와 ‘봉우리’를 뜻하는 이름, 두봉 주교는 그렇게 한국 땅에서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을 사랑한 프랑스인’으로 70여 년 삶을 이어가게 된다.

 

 

대전교구에서 사목하던 그는 1969년 5월 신설된 안동교구의 첫 교구장으로 임명된다. 1969년 7월 25일 주교품을 받고 안동교구 발전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았다. 교구장이었음에도 두봉 주교에게는 특별한 문장이나 표어가 없었다. 다만 안동교구 사명 선언문인 ‘기쁘고 떳떳하게’는 그가 선종 직전까지도 강조하고 소중히 여겼던 ‘사제로서의 사명’이었다. 2023년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아 본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야합니다.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불의 앞에 사회 정의를 외치다

 

 

이렇듯 두봉 주교의 신앙은 내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며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그는 농민들의 편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77년 10월 30일, 안동교구는 주일미사 대신 공소예절로 대치하고 교구장 두봉 주교를 포함한 전 사제단이 신자 800여 명과 함께 안동문화회관 내 동부동성당에서 합동미사를 봉헌했다. 당국의 인권 유린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두봉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법과 양심’을 주제로 강한 어조로 정부를 비판했다. 유신정권의 심기를 건드린 두봉 주교에게 엄청난 압박이 가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이후로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던 1979년 5월 5일,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오원춘 분회장이 보안기관에게 납치돼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군청에서 농민들에게 보급한 감자종자가 불량인 것이 대대적으로 드러나면서 이 사실에 항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농민회 임원이 농민을 위해 나섰다는 이유로 영양군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납치돼 포항과 울릉도로 끌려가 모진 일을 당한 것이다. 

 

 

두봉 주교는 즉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정부의 탄압에 항거하는 전국 특별기도회를 시작했다. 기도회에 참석했던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강조한 “이 땅에서 민주주의를 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두봉 주교가 꿈꾸던 ‘진정한 한국의 미래’였다. 유신정권은 1979년 8월 18일 두봉 주교에게 ‘자진출국’할 것을 명령했으나 그는 이를 당당하게 거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민주주의를 행하지 않았던 유신정권은 스스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 소탈했던 삶, 넘쳤던 한국 사랑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 땅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그는 안동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 땅의 사회·문화 발전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회적 약자와 농민을 위한 돌봄 시설과 기관 설립이 이어졌다. 한센병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 그는 1973년 경북 영주시에 ‘다미안 의원’을 개원하게 했다. 1978년에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해 가난한 농민들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나섰다.

 

 

미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69년 상지여자실업고등전문학교가 설립됐으며 이는 현재 가톨릭상지대학교의 발판이 됐다. 신자와 지역민을 위한 문화 사업을 위해 1973년 안동문화회관을 설립해 지역 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일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목활동에 매진했던 그의 삶은 ‘소탈’ 그 자체였다. 1990년 은퇴 후 경기도 행주공소에서 지내던 그는 현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의 간곡한 요청으로 200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에 자리잡았다. 소박한 텃밭을 일구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던 그에게 ‘신자·비신자’라는 구별은 없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밝은 표정으로 대하며 진심을 주고받았다. 안동교구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령의 몸을 이끌고 참석해 농민들과 함께 꽹과리를 치며 즐기는 등 소탈한 모습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항상 빛나는 존재입니다. 항상 떳떳하십시오.” (2023년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으며 본지와 나눈 인터뷰 대화 중)



 

 


◆ 두봉 주교 약력 ◆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출생

1947년 4월 20일 오를레앙시 쌩끄로아 고등학교 졸업

1949년 6월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 졸업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 가입

1951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신학과 졸업

1953년 6월 29일 사제서품

1954년 6월 로마 그레고리안 대신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1954년 12월 19일 ~ 1955년 5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신부

1955년 5월 ~ 1965년 5월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 신부

1965년 5월 ~1967년 8월 대전교구청 상서국, 상서국장 신부

1967년 9월 ~ 1969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신부

1969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 명에 의해 제1대 안동교구장으로 임명

1969년 7월 25일 주교수품 및 교구장 착좌식

1970년 10월 ~ 1984년 11월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1981년 10월 ~ 1984년 11월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 위원장

1984년 11월 ~ 1990년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 위원

1985년 10월 ~ 1990년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위원

1981년 11월 ~ 1990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1990년 10월 6일 안동교구장 사임, 은퇴

1990년 12월 2일 안동교구장 이임

2025년 4월 10일 선종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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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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