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얼굴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교황직 수행의 역사와 업적을 살펴본다.
2013년 3월 13일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세 마리아 베르골료 추기경이 베드로 사도의 계승자로 선출됐을 때 그는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새 교황의 첫 모습을 보기 위해 어두워진 성 베드로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들 앞에 그가 나섰을 때,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면모가 시작됐다.
교황을 드러내는 아무런 상징도 없이 그저 소박한 흰색 수단을 입은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의 일상적 저녁 인사인 ‘보나 세라’(Bouna sera)로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교황으로서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숙이고 하느님 백성에게 겸손하게 기도를 청했다. 그리고 자신은 ‘세례받은 이들 중 한 명’으로 소개함으로 교황이기 앞서 하느님 백성의 일원임을 드러냈다.
그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아시시의 ‘가난한 작은 사람’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정했다. 선출 직후 그는 콘클라베 기간 머물렀던 숙소로 돌아가 자신의 짐을 직접 싸고 숙박비를 지불했다. 그리고 교황궁을 마다하고 ‘성녀 마르타의 집’에 거주하기로 했는데, 이는 흔히 짐작하듯 그저 가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지향만은 아니다. 교황궁 자체가 화려하거나 사치스럽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람들이 모이는 곳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쩌면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복음의 기쁨을 나누기를 원했던 듯하다. 그는 ‘사목자’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이민자 가정 출신
바티칸공의회 가르침 따라 살며
빈민들과 어울리고 청빈 실천
잘못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아픔 껴안고 자비 베풀던 사목자
■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목자
호세 마리아 베르골료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8년 3월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1969년 12월 13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당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큰 영향을 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록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과 사제직은 공의회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고, 실제로 교황 재임 내내 공의회의 가르침을 모든 교황직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다.
1973년 예수회 종신서원을 한 그는 같은 해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임명됐다. 불과 36살의 나이였다. 그리고 1992년 5월 베르골료 신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됐고 1998년에는 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주교직 수행의 시기는 훗날 그가 교황이 되어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이끌면서 보여준 신학적 전망과 사목직 수행의 바탕이 됐다. 그는 250만 명 이상의 교구민이 있는 대교구를 이끌면서 스스로를 ‘사람들 가까이 있는 목자’로 자리매김했다. 항상 버스로 이동했고 거리낌 없이 빈민가를 방문했으며 소박한 아파트에서 직접 요리를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호세 신부’로 불렀다.
당시 그의 사목 활동의 요체는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빈민가에 거주하며 사목하는 ‘빈민가 사제단’을 창설해 항상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고 둘째, 민중 신앙과 대중 신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셋째, 교회가 제대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교적 전망, 그리고 넷째 성직자를 사회의 지배 계급의 일부로 보는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에 거슬러 성직자의 특권을 거부했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 그리고 사제와 주교직을 수행했던 아르헨티나에서의 사목 활동의 체험과 가난한 이들과의 삶은 그의 교황직 수행 안에서 깊은 연관성을 드러내며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2007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발표된 ‘아파레시다 문서’ 수석 편집자로서의 체험이 더해진다. 이 문서는 대륙적 선교를 촉구하면서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한다는 핵심 사상을 담고 있다.
■ 하느님 자비의 교황
교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22일 교황은 첫 해외순방지인 브라질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동성애 사제와 관련된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누군가 동성애자인데, 그가 주님을 찾고 선의를 가졌다면 제가 그를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는 판단과 단죄보다는 위로와 격려, 치유의 하느님을 선포하는 사목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대답은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013년 3월 17일 교황이 된 후 첫 주일 삼종기도 자리에서 그는 위험한 진보주의자로 여겨졌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말을 인용해 “자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말했다. 교황 선출 당시부터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가 교황직의 키워드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자비로써 하느님 백성의 고통에 공감하고 치유하기를 원했던 교황은 2014년과 2015년 가정을 주제로 한 세계주교시노드를 소집했다. 피임, 동성애, 이혼 후 재혼자의 영성체 허용 등 민감한 현안들을 다룬 시노드 후속 문헌으로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이 반포됐다. 물론 교황은 성과 생명, 가정에 대한 교리를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명백히 사목적 차원에서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즉 현대 가정의 잘못된 행동들을 단죄하기보다는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또 2015년 3월 13일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고 4월 11일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반포했다. 교황은 「자비의 얼굴」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인종 학살, 집단 살육이 자행된 20세기에 이어 여전히 계속되는 비극적 상황들을 우려하며 특히 가난한 이들을 걱정했다. 그래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항상 찾아 나섰다. 변방으로 나아가는 교회,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의 표상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활동과 교회 통치의 바탕이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크기만큼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의에 단호했다. 불의한 현실과 세력에 대한 그의 분노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빈민가와 전 세계 빈곤 지역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가난한 이들의 현실로부터, 그는 경제 정의를 교황직 수행의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인간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절대적 금지인 것처럼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반포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는 이른바 통합생태론, 즉 자연생태와 인간생태가 깊이 연관됐다고 피력했다. 공동의 집 지구 환경이 파괴될 위험에 직면해 있고 그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한 이들이다. 여기에서 교황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이 지구 환경 보호를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지향
불의한 헌신과 생태 위기 경고
교회 직면한 과제 해결하고자
새로운 법과 제도 틀 마련하고
‘시노달리타스’ 주제 시노드 개최
■ 개혁과 쇄신의 교황
교황은 교회가 하느님 자비를 드러내는 얼굴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는 당연히 교회의 개혁과 쇄신으로 이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직 수행의 또 한 가지 축은 개혁과 쇄신이었다. 그가 교황에 선출됐던 당시 가톨릭교회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었다. 교회 안에 침투한 세속화로 사회적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수십 년간 이어진 고질적인 성직자 성학대 추문으로 도덕적 위신도 무너졌다. 교회는 사회적 위신도, 자신의 정체성과 방향성도 잃은 듯했다.
그는 자신의 교황직 수행의 청사진으로 여겨졌던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나그넷길에 있는 교회는 그 자체로서 또 인간적인 지상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받고 있다”(일치교령, 6항)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인용하면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을 강조했다.
교회 쇄신은 당시 두 가지 큰 과제의 해결을 먼저 요구했다. 하나는 교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성직자 성학대 추문, 다른 하나는 교황청의 불투명한 재정 운영 문제였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교황은 이 두 가지 문제와 관련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새 법과 제도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교황직과 보편교회의 중앙 조직들’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보편교회 쇄신의 방향성은 당연하게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특히 「교회헌장」이 제시하는,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친교의 교회론에 바탕을 둔다. 그는 스스로 ‘세례받은 이들 중 한 명’으로서 ‘로마의 주교’라고 칭하며 세계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보다는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고자 했다. 또 교황청 각 부서와 교회의 여러 직무에 평신도들, 특히 여성의 참여를 확대했다.
그 정점에 이른 것이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한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였다. 3년 여의 긴 여정 동안 진행된 이번 시노드는 여러 면에서 이전의 시노드들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하느님 백성의 의견을 교구와 본당 단계에서부터 실질적으로 경청하는 단계를 강화했고,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와 수도자들이 투표권을 갖고 참여했다.
■ 긴장과 갈등
재위 초기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저항은 단지 스타일의 차이나 언론의 과장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2016년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이 이혼 후 재혼 신자의 영성체 허용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열게 되자 보수파의 반발이 강경해졌다. 미국의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 등 5명의 추기경이 5가지 교리적 질문을 제기했다. 2018년에는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가 교황과 교황청이 시어도어 맥캐릭 추기경의 성학대 사건을 은폐했다고 공개 비난하며 교황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도전은 보수진영 그 반대쪽으로부터도 다가왔다. 독일교회의 ‘시노드의 길’(Synodal Path) 추진 문제다. 독일의 주교와 평신도들은 교회 개혁의 ‘속도 조절’ 경고에 전혀 응답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논쟁적 개혁 방향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과 쇄신 작업이 온전히 궤도에 오르지는 않은 상태에서 후임 교황은 아직 성숙되지 않은 개혁과 여전히 이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다시 하나로 이끌어야 하는 고된 사목적 도전을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혁과 쇄신의 문이 아직 활짝 열리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잠금쇠는 열렸고, 그 문을 다시 잠글 수는 없는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삼천년기 쇄신된 교회를 향한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