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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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 가톨릭신문 폐간 시기(1933~1949)의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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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11세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1900주년을 맞는 1933년 특별성년을 선포했습니다. 이 뜻깊은 시기를 맞아 조선의 5개 교구(경성, 대구, 원산, 평양, 연길) 교구장들은 그해 3월에 열린 연례 주교회의를 마치고 ‘가톨릭 진행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공동교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공동교서에는 모두 14개 주를 달아 그 뜻을 해설했는데 그 중 13번째 주에서 “금번 회의에 5교구가 연합하여 지식 청년을 상대로 가톨릭청년이란 월간잡지를 발간하기로 결정되어 지금 준비 중이니 이 잡지와 경향잡지만이 5교구에서 함께 인정하는 것이오, 기타 각 교구에서 월보를 발간할 수 있으나 그 교구 안에만 한함”이라고 규정돼 있었습니다. 당시 천주교회보는 조선 전역은 물론 해외에까지 고루 독자들이 퍼져 있었기에 사실 이는 발행을 중지해야 한다는 결정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기존의 교회 잡지를 통폐합하고자 했던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5교구 주교회의는 그리스도 구속 사업 1900주년 성년에 즈음해 조선 교회의 발전과 민족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전교 계획과 방안들을 모색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외 전교 활동을 전개하고, 가톨릭 정신을 우리 사회와 문화 전반에 전파하기 위한 대외적 교양 잡지를 중앙에서 발행하기로 한 바 교회의 힘과 노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함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기존에 대구의 청년회와 경성의 연합청년회가 각각 발행하던 천주교회보와 ‘별’이 발행 중지됐습니다. 천주교회보는 73호(1933년 4월 1일자)에 폐간사도 없이 붉은 잉크로 이중 인쇄된 폐간공고로 오랜 침묵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별’은 ‘폐간을 고하며’라는 사설을 실은 제71호(1933년 5월 10일자)를 종간호로 폐간됐습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회보는 1949년 4월 1일 다시 복간되기까지 16년 동안 교회의 중요한 소식들을 전혀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폐간 시기의 한국 교회


가톨릭신문이 폐간됐던 시기 동안 일제의 조선에 대한 억압은 한층 극심해졌습니다. 조선 교회에서는 급격하게 교구가 증가하고 조선인 성직자들의 수가 늘어나 선교사 위주의 교회 운영에서 조선인이 교회를 관리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조직과 제도면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실질적인 복음화율은 답보와 침체 상태에 빠졌습니다. 대륙 침략 전쟁을 본격화한 일제의 수탈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교회에도 혹독한 피해를 입혔고, 그 과정에서 교회는 일제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개항기 높은 신자 증가율에 고무된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일제의 약속을 믿고 지속적인 발전을 내다보면서 교구 분할을 시도합니다.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합니다. 1920년에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관할하는 원산대목구가 신설됐고, 1928년에는 원산대목구에서 연길지목구가 분리됐고 1940년에는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가 설정됐습니다. 이에 앞서 1927년에는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가 관할하는 평양지목구가 설정돼 1939년에 대목구로 승격됐습니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발전한 듯 보였으나 식민통치 하에서 실제 신자 증가율은 급격하게 둔화됐습니다. 개항기의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7에 가까운 높은 수치를 보였지만 한일 병합 이후 10여 년 후인 3.1운동 당시 8만 8523명에 불과했고 이 시기 신자 증가율은 2.10에 그쳤습니다. 신자 수 10만 명을 돌파한 것은 1926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1919년부터 1944년까지 신자 증가율은 연평균 3.0로 저조한 수치였는데, 때로는 신자 수가 오히려 감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예를 들어 1941년에는 신자 수가 18만 3262명이었는데 3년 뒤인 1944년에는 17만 9114명으로 4148명 감소했습니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천주교 신자는 전체 인구의 극히 미미한 부분이었습니다. 한일 병합 당시 조선의 인구는 대략 1300만 명 가량으로, 그중 신자 비율은 0.56에 불과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는 0.53, 해방 직전인 1944년에도 0.71에 그쳤습니다.


이처럼 개항기와는 달리 일제 강점기 동안 신자 증가율이 극히 저조했던 이유는 가장 먼저 일제의 교회에 대한 억압과 규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교회 공동체를 찾아오던 많은 신앙 선조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 곧 순교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공동체는 확장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일제하에서 민족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던 교회의 모습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의 생존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교회의 안이한 태도가 가장 큰 이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신자 증가율의 둔화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대륙 침략 정책을 강화합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진주만 공습을 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킵니다. 일제는 총력으로 전쟁에 임했고 조선도 그 전쟁에 동원돼야 했습니다. 조선의 모든 것이 전쟁에 이용됐고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일환으로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협력자로 편입됐고 그 과정에서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혹독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수밖에 없는 행태를 보이고 맙니다.


일제의 감시망을 벗어나 임명된 최초의 한국인 주교였던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의 경성대목구장 취임사는 “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야 행정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 복종하라”며 일제에 충성하라고 말했습니다. 노 대주교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을 맡았고 전쟁에 나서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대동아전쟁기구’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교회가 황군의 무운을 비는 미사를 봉헌하고 국방비를 헌납하며 전쟁의 각오를 다지는 시국 강연회, 학도병 독려 등의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과 함께 맞은 해방, 교회는 무신론과 공산주의의 도전에 직면합니다. 과거에 대한 성찰이 충분히 이뤄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교회는 해방 후 혼돈의 조국에서 반공에 나서며 곧 닥쳐올 민족 상잔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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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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