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수원 화성 화홍문’, 유리건판, 1911년 3월 29일 수원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키스가 수채화로 그린 화성 ‘화홍문’ 촬영
수원 화성은 아름다운 성이다. 지금도 많은 이가 찾아와 그 아름다움에 매료돼 사진을 남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조차 화성의 풍경을 촬영해 조선 풍속 사진첩을 출간·판매했다. 또 영국인 엘리자베스 키스는 화성 화홍문을 수채화로 그렸다. 그녀는 한국을 그린 수채화 작품 38점을 엮어 「Old 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을 출간했다. 이는 세계에 조선을, 우리나라를 알린 최초의 서양화로 평가받는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키스가 수채화로 그린 ‘화홍문(華虹門)’을 촬영했다.<사진 1> 화성에는 남북으로 수원천 물길이 통과하는 2개의 수문이 있다. 이 중 북쪽 성벽에 설치한 북수문이 ‘화홍문’이다. 무지개처럼 생긴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다. 이 무지개 모양의 일곱 홍예 때문에 수문 이름이 화홍(華虹) 곧 ‘화성의 무지개’로 불렸다.
수원천 강물이 화홍문 홍예로 힘차게 흘러 내려와 방화수류정으로 장쾌하게 떨어지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게 장관이어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며 수원 삼경으로 꼽았다. 그래서 화홍문은 군사시설이지만 평소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화홍문은 정말 귀한 사진이다. 이 화홍문이 10년 뒤인 1922년 홍수로 유실됐기 때문이다. 1932년 복원된 새 화홍문을 엘리자베스 키스가 수채화로 그렸다.
베버의 사진 속 화홍문은 단아하고 아름답다. 화홍문은 성벽과 망루·성문과 연결돼있고, 왼편 너른 공터 뒤로 민가가 자리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화홍문을 다녀갔는지 편편하게 다져진 오솔길이 꽤 넓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이곳에 왔을 때가 1911년 3월 말이어서인지 물이 말라 화홍관창을 사진에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수원 화성 화서문’, 유리건판, 1911년 3월 29일 수원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수원 화성 서장대’, 유리건판, 1911년 3월 29일 수원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7개의 석조아치로 만들어진 ‘요정의 사원’
베버 총아빠스는 화홍문을 ‘요정의 사원’이라 표현했다. “이제 냇가로 내려가야 한다. 시냇물 위쪽의 ‘요정의 사원’도 성벽 일부다. 냇물이 그 아래를 통해 성내로 흘러든다. 물이 얕아서 적들이 마른 발로 내를 건너 성안으로 밀고 들지 못하도록, 성벽 밖에 내를 막아 큰 못을 만들었다. 성벽과 안쪽으로 다리 하나를 지탱하는 일곱 개의 아치 밑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와, 모랫바닥으로 빠르게 떨어진다. 백성들이 조국의 아름다움에 주목할 수 있도록, 당국은 그림처럼 가지 휘늘어진 소나무 몇 그루로 이 수려한 풍경을 완성시킨 후 일 원짜리 지폐에 담았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21~222쪽)
베버 총아빠스는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한 프레임에 담아 촬영한 것 외에 별도로 ‘화서문’만을 촬영했다.<사진 2> 조선 시대 성문의 형태를 자세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문은 매우 용의주도하게 지어졌다. 반원형으로 돌출된 옹성은 적의 파상 공세를 막는 방파제 구실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장에 내다 팔 물품을 싣고 성내로 들어가는 우마차 행렬만 옹성 주위를 휘돌고 있을 따름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20쪽)
베버 총아빠스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다. 장대는 군사 지휘소를 말한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2층 목조 건물이다. 아래층은 3칸 구조로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했다. 위층은 1칸 구조로 감시 초소 역할을 했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정조 임금은 1795년 윤2월 12일 현륭원을 참배한 후 서장대에 올라 군사 훈련을 직접 지휘했다. 그리고 현판에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글과 시문을 썼다. 베버 총아빠스는 서장대를 수채화와 함께 사진에 담았다.<사진 3>
“서편 언덕을 올라 짙푸른 솔밭 아래 숨은 작은 산에 이르렀다. 성긴 숲 가운데서 성벽이 끊겼다. 성벽 끝에 돌출된 망루 아래로 깊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꼭대기 지붕은 세찬 풍우를 견디며 그 힘을 과시했다. 도시에서 제일 높은 그곳이 비상시 수비대장의 지휘소였다. 여기서 그는 성 안팎과 발치의 행궁을 감시하고 경비했다. 들판 저 멀리에서 접근하는 적의 동태도 관측되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22쪽)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수원 화성 행궁 신풍루’, 유리건판, 1911년 3월 29일 수원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혜경궁 홍씨 회갑연 열면서 신풍루로 개칭
베버 총아빠스는 화성을 빠져나오면서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에 들렀다.<사진 4> 창건 당시 ‘진남루(鎭南樓)’라 이름 지었으나 1795년 정조 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신풍루라 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신풍루를 빠져나오면서 허물어진 화성을 통해 빛바랜 조선의 영화를 안타까워했다. 또 성문 턱까지 일반인이 상주하는 것을 보고 숨통이 옥죄이고 있는 지금의 한국인들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서서히 녹슬어 가는 옛 무기고의 일부처럼 행궁이 있었다. 수원 화성을 지은 임금은 시내에서 몇 시간 거리의 교외에 있는 한국 남부의 유일한 숲에 자신이 영면할 곳을 정했다. 그는 가끔 수원 행궁을 찾았다. 지금은 외국인들이 드나든다. 행궁 앞 지사 관저에는 벌써 일본인들이 상주하고 있다. 단아한 후원은 황폐해졌다. 작은 정원을 몇 개 더 지나 행궁 앞에 섰다. 아랫것들의 궁색한 처소 뒤로 물러난 궁은 몹시 검소했다. 남은 시설물이라고는 석조 기단 양 가의 철제 수조 둘뿐이다. 고작 반 입방미터 남짓의 물만 담을 수 있는 이 수조는, 과거에도 화재 예방에 있어 상징적인 역할에 그쳤을 뿐일 것이다. 목조 건물이 불타는 판국에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옛 조선 왕조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편한 기억을 말해 주듯, 지금은 물조차 없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