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마르탱 바실리카. 51m 높이의 돔 위의 성 마르티노 동상과 뒤로 옛 익랑의 종탑인 48m 높이의 샤를마뉴탑이 보인다. 1860년 옛 바실리카 땅의 주택 지하실에서 성 마르티노의 무덤이 발견된 후, 부지를 다시 확보하여 1886년부터 1902년까지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성당을 소규모로 지었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230㎞ 떨어진 투르는 유서 깊은 문화 도시입니다. 루아르강과 셰르강이 흐르는 데다가, 파리·보르도·낭트를 잇는 교통 요지여서 로마 제국의 갈리아 지방 중심지였지요.
이곳은 유럽의 운명을 좌우한 역사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 군대는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를 격퇴합니다. 이 승리로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에서 강국으로 부상하고, 이슬람 세력의 팽창은 이베리아반도에 그치게 됩니다. 현재는 슈농소를 비롯해 아름다운 성(城)들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죠.
마르티노폴리스의 중심 생 마르탱 수도원
투르역을 나서서 트램 선로를 따라 걸으면 고풍스러운 시청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서부터 번화가인 나시오날 거리가 북쪽으로 뻗어있습니다. 그 길 끝에 옛 돌길이 시작되면서 상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왼편 골목 어귀 너머로 오늘의 목적지인 생 마르탱 바실리카의 돔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투르는 옛날 이 거리를 두고 주교좌 대성당과 투르성(城)이 있던 구도시와 노르만족 침입에서 생 마르탱 수도원을 보호할 목적으로 새로 건설한 신도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쪽 신도시는 ‘마르티노폴리스’, 즉 성 마르티노의 도시라고 불렸죠.
왜 이렇게까지 수도원을 지키려 했을까? 생 마르탱 수도원은 이름대로 성 마르티노의 성해를 모신 순례지로 예루살렘에 비견되던 성지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 아래로 들어가면서 순례가 힘들어지자, 813년 프랑스 샬롱 공의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로마와 성 마르티노의 성해가 모셔진 투르에서도 예루살렘 순례의 은총을 똑같이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생 마르탱 바실리카의 돔, 주 제대와 성인의 머리뼈 성해. 돔 가운데에는 성 마르티노가 앉아서 이곳을 찾아온 이를 축복하고 있다. 주 제대에 성인의 성해가 모셔져 있어서 ‘머리 제대’라고도 부른다. 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치형 기둥과 벽 장식은 초대 교회에서 영감을 받았다.
삶으로 신앙을 증거한 성 마르티노
성 마르티노는 서방 교회에서 순교가 아니라 삶 자체로 신앙을 증거한 가장 대표적이고 널리 공경받은 인물입니다. 로마군이었던 마르티노가 아미앵에서 추위에 떠는 거지를 만나 자기 망토를 반으로 잘라 나누어 준 일화는 한 번쯤 들어보셨겠지요.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에서 그 망토를 입은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를 계기로 세례를 받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지요.
그는 군대를 떠난 뒤 은수생활을 하다가, 361년 형제들과 서유럽에서 현존 가장 오래된 리귀제 수도원을 세웁니다. 금욕과 침묵 등 동방의 수도자 전통을 따르면서 공동 기도·노동 중심의 생활을 하며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는데, 이는 훗날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의 모델이 됐습니다. 지금도 리귀제 수도원에선 20명의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생활하고 있습니다.
371년 마르티노는 투르의 제3대 주교로 선출됩니다. 주교는 뛰어난 설교·사랑과 나눔으로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이교도의 우상과 사원을 파괴하며 그 자리에 수도원과 성당을 세우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수도원과 교구 사목을 최초로 결합한 형태로, 훗날 서유럽 복음화 모델이 됐습니다.
437년 수도원에 성인의 유해와 망토를 모신 목조건물이 건립됩니다. 이 건물은 작은 망토를 둔 장소라는 의미로 ‘카펠라’라고 불렸는데 오늘날 소성당 명칭이 여기서 유래됐습니다. 471년 그 위로 ‘성 마르티노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석조 성당이 들어섰고, 순례자들이 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 대성당으로 탈바꿈하지요.
지하 성당의 성인 무덤. 초기 무덤 위에 5랑 구조의 성당 모습을 구현해 무덤을 만들었다. 측면으로 고대 묘비와 성유물함을 볼 수 있으며, 바닥에 초기 교회의 경계가 드러나 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바실리카와 현재 바실리카 도면. 주변 도로가 상업 중심지로 바뀌었기에, 무덤 자리에 맞춰 남쪽을 정면으로 한 성당을 건축할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의 첫 순례지 생 마르탱 바실리카
지금은 성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19세기 후반에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새로 지은 성당이 순례자를 기다립니다. 지금은 대성전이라고 하기엔 다소 아담하지만, 도면을 보면 예전엔 훨씬 크고 웅장한 성당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중 파괴됐고, 심지어 수도원의 부활을 막으려고 부지를 쪼개고 도로를 냈습니다. 그래서 종탑들이 지금처럼 덩그러니 떨어져 있게 됐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생 마르탱 바실리카가 서유럽의 첫 순례지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가의 산실이어서 앙시앵레짐의 상징처럼 비쳤기 때문일 겁니다.
496년경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도베쿠스는 성인의 무덤을 방문해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 개종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 후 랭스에서 세례를 받고, 508년에 투르로 돌아와 성인을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지요. 게다가 987년에 프랑스 국왕이 된 오를레앙 백작인 위그 카페는 이곳 생 마르탱 ‘평신도 수도원장’이었습니다. 그의 성(姓)인 카페는 라틴어로 카파, 즉 성인의 망토에서 유래했으니 프랑스 국민에게 생마르탱 바실리카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성당의 높은 천장과 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치형 기둥과 벽 장식이 인상적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서 성인의 일생을 볼 수 있는데, 빛이 바닥에 반사되어 성당을 은은하게 감쌉니다. 돔과 22개 창에서 내려온 빛까지 더해져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옛 무덤터 위에 세워진 주 제단에는 성 마르티노의 중요한 유물인 그의 머리 일부가 성해함에 모셔져 있습니다. 지하 성당에서는 성인 무덤과 초기 교회의 흔적, 성인의 전구로 이뤄진 기적의 증거를 보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지요.
프랑스에서 성 마르티노 기념일인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로 휴일입니다. 그날 생마르탱 바실리카에 순례자들과 신자들이 모여 성인을 기립니다. 제가 있던 독일어권에서는 저녁에 아이들이 등불을 들고 성 마르티노의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며 빵과 과자를 나눕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선함을 비추는 성인의 삶을 기리는 축제일이지요.
성 마르티노는 익명의 수도자로 가난한 삶을 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교회 지도자로 부르셨고, 가난한 삶 속에서 세상의 악과 맞서며 복음화의 초석을 쌓았습니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추모하며, 하느님께서 이 시대의 표징을 읽고 이끌 새 목자를 불러주시길 기도합니다.
<순례 팁>
※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TGV로 1시간 10분 소요. 도심에서 도보로 이동.
※ 생 마르탱 바실리카 전례: 주일·대축일 미사 11:00, 평일 미사 11:00 / 성체조배 주일과 대축일 14:00~16:00, 평일(화~토) 16:00~18:00. 성당 옆에 순례자 숙소(Maison Saint Ambroise)가 있다.